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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22. 2023

위화도 (威化島)

이성계와 함께 조선건국을 한 배극렴, 증평에 잠들다. 

압록강 하구에 생긴 하중도에는 넓은 모래밭과 같은 땅이 만들어졌다. 그곳은 고려와 명을 이어주는 가장 짧은 거리의 공간이기도 했다. 이곳에 수많은 병사들이 모였다. 지금도 큰비는 많은 재난을 만들기도 하지만 과거에는 그 영향이 훨씬 컸었다. 그 섬과 같은 곳에도 큰 비가 내리고 물이 넘쳐서 군사 수백 명이 여울에 휩쓸려 빠졌고 말 그대로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 이들을 이끌었던 사람은 바로 이성계였다. 수도에는 최영장군이 있었으나 총사령관인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의 역할을 맡기만 하고 있었다. 

증평에는 배극렴이라는 사람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고려말에 왜구를 토벌했으며 조선의 일등개국공신이기도 하다. 그는 1388년 요동 출병 때 우군의 조전원수로 우군도통수인 이성계의 휘하에서 위화도까지 갔던 사람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오래전에 사용한 빨래터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 끊임없이 맑은 물이 솟아 나오는 것이 마치 약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래전에는 마을마다 빨래터가 있어서 아낙들이 모여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지금의 사랑방역할을 빨래터가 했던 것이다. 

조민수(曹敏修)가 좌군도통사, 이성계가 우군도통사를 맡고 떠난 요동정벌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우왕에게 회군을 요청했으나 우왕과 최영은 빨리 진군하라는 뜻만 밝히며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왕이 살피지 못하고 최영이 늙고 어두워 듣지 않으니, 그대들과 함께 들어가서 왕에게 친히 화와 복을 아뢰고, 왕 옆의 악한 사람(최영)을 제거하려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이성계가 개경으로 향했다.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이 묘소는 배극렴이라는 사람이 잠자고 있는 곳이다. 1390년(공양왕 2)에 평리로서 회군공신에 추증되었으며 같은 해에 양광도찰리사가 되어 한양 궁궐의 조성에 참여하였다. 이어 삼군도총제부의 중군총제사가 되어 도총제사 이성계의 병권 장악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배극렴이라는 사람은 이성계라던가 고려의 마지막을 그릴 때 자주 등장하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는 조선이 개국할 때인 1392년 수문하시중에 올랐으며, 그 해 문화우시중으로 조순, 정도전과 함께 고려의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해서 조선건국에 중요한 소임을 담당하였다. 

1392년은 가장 많은 일이 일어났던 해이기도 하다. 4월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 도중 낙마해 부상을 입고 현지에 머무르는 틈을 이용해, 정몽주, 이숭인(李崇仁), 이종학(李鐘學) 등 온건 개혁파는 이성계 일파를 탄핵하고 귀양 보냈는데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李芳遠)과 이성계의 동생 이화(李和)의 사위 이제(李濟) 등은 서로 모의해 정몽주를 선죽교(善竹橋)에서 피살했다. 

누군가의 묘소를 찾는 것은 앞으로 많지 않을 수 있다. 화장이 일반화된 시대에 묘소는 결국 과거로 사라지게 될 것이기도 하다. 

 1등 개국공신이 되고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으며,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이 되었던 배극렴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해인 1392년 11월에 세상을 떠났지만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 소생인 이방석(李芳碩)이 세자에 책봉되는 데 관여했다는 이유로 뒤에 태종에 의해 폄하(貶下)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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