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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04. 2017

한국의 R&D란

무얼 하고 싶은 것일까. 

일본은 2,000년대에만 자연과학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17명이나 배출한 나라다. 그럼 한국은 현실은 어떨까.  어떤 이는 한국의 시스템의 문제가 있다고 어떤 이는 연구를 하는 사람의 마인드가 문제라고 한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명확하게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쪽 분야에 발을 담가본 사람으로서 후자가 더 문제가 크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그런 후자들이 그 윗자리에 올라가서 비슷한 상황이 되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그런 길을 걷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보아왔다. 


한국은 기업 R&D에 지원하는 비중은 국내 총생산을 기준으로 OECD 3위이며 정부가 투자하는 금액도 상위에 랭크되어 있다. 그러나 2015년 기준 전 세계 연구기관 500개 중 우수 연구기관 10위 랭크된 곳은 한 곳도 없으며 한국 지성의 최고봉이라는 서울대조차 68위 정도에 불과하다. R&D 투자를 효과적으로 하면서 기초연구에 대한 역량 확보와 미래 먹거리를 만들기 위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할 때이다. 


정치와의 선긋기 필요 


지난해 최순실 발 정국 혼란이 시작되어 해가 바뀌었지만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헌재 판결이 나온 후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상황이 봉합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최순실은 대한민국의 예산이 집행되는 곳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만큼 광범위했다. 문제는 굳이 최순실이 아니더라도 R&D에 정치인이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는 데 있다. 연구자 역량이나 연구주제와 상관없이 예산을 집행하는 기관이나 관리 감독하는 기관에서 정치인들의 입맛에 맞게 초기 목표와 달리 연구 목표를 틀어버리는 것이 일상다반사이다. 특히 청와대의 주인이 바뀌는 것에 따라 연구 자체가 없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치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R&D와 관련된 유관부서가 상위 정부부처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독립적일 필요성이 있다. 연구와 관련된 정부부처의 공무원이 자신의 입지와 승진을 위해 윗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즉 자신의 실적을 위해 자신과 관계되어 있는 연구자를 밀어주거나 역량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예산을 밀어주기도 한다. 단적으로 최순실 사태에서 그런 입김이 충분히 작용하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단기성과에 급급한 결과 


세계를 이끌고 있는 과학기술은 대부분 미국, 일본, 독일 같은 R&D을 주도하는 국가에서 나왔다. 이 국가들의 공통점은 단기성과에 급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초연구에 대한 성과는 3~5년 만에 나오지 않는다. 최소 10년 길면 30년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국내 R&D의 상당 부분은 5년 단위로 연구가 진행된다. 게다가 1년이 멀다 하고 실용화 점검이니 2~3년쯤 되면 중간평가를 거쳐 연구내용에 칼질을 한다. 그런 토양 아래서 연구는 성과가 아닌 페이퍼만 남을 뿐이다. 그 페이퍼 중에는 의미 없는 논문들도 적지 않다. 


게다가 상위 정부부처의 입맛에 따라 R&D에 상용화라는 성과를 입히려고 상당히 많은 노력을 한다. R&D에 참여하는 기업들도 적지 않지만 정부가 투자하는 R&D에 대기업이 참여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있다고 하더라도 주력이 아닌 곁가지 같은 형태로 진행할 뿐이다. 대학이나 연구기관이 진행하는 연구는 상용화를 염두에 두고 하는 것보다는 향후 기업이나 기관이 연계된 사업 등을 진행할 때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거나 체계적인 진행을 도와주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초기에 목표가 설정되어 있다면 모를까 중간에 임의대로 상용화나 특허의 숫자를 제시하는 것은 행정편의적인 발상이다. 연구의 역량을 새나 가게 만들 뿐이다. 


연구자의 자세 


한국에서 R&D에 책임자나 수석연구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교수로 제한이 되어 있다. 전부는 아니지만 학위에 상관없이 역량만 되면 예산을 집행해주는 미국이나 일본과 달리 한국은 타이틀이 가지고 있는 권위는 달콤하다. 그렇기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일명 보따리장수로서 10년 이상 생활을 하면서도 교수가 되려는 사람이 줄을 서고 있는 곳이 한국의 현실이다. 꼭 교수 = 역량 있는 사람 or 실력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우리는 전문가라고 딱지가 붙는 순간 모든 것에 너그러워진다. 


문제는 안주된 환경에서 R&D에 참여한 교수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자신의 이해득실에 따라 연구를 악용한다는데 있다. 사실 R&D는 수익을 내는 사업 아이템이 아니라 말 그대로 국가의 미래 먹거리를 만들고 지성인으로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앎, 사회문제 해결, 산업혁신 등을 추구하는 것이다. 연구자의 자세가 안되어 있다면 과감히 연구자의 역량을 검토하여 개선의 여지가 있는지 판단하고 개선의 여지가 없다면 바꿀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교수에 한정되어 있는 R&D의 문호를 더 넓힐 필요성이 있다. 제한된 재원에서는 한계가 있는 결과만 나올 수밖에 없다. 


르네상스 시대가 예술의 전성기였다면 현대사회는 과학기술의 전성기이다. 르네상스 시대가 빛을 발휘했던 것은 새로움을 추구하던 예술가들을 제약 없이 받아들이고 후원하는 데 있었다. 과학기술의 전성기를 맞이해야 되는 이 시기에 한국은 조선시대 반상의 법도를 현대식으로 적용하고 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정신은 바뀌지 않은 채 어떻게 R&D에서 성과를 낼 수 있겠는가. 


유럽연합(EU)의 공식 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Eurostat)가 최근 발표한 '세계 속의 EU' 자료에 따르면 GDP 대비 R&D 비용(2013년 기준)에서 한국은 4.15%로 1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부부처, 연구자, R&D의 전략적인 접근성의 부재로 인해 총체적인 난국에 처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R&D에 대한 투자는 아끼지 않아야 한다. 굳이 4차 산업혁명을 언급하지 않아도 미래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먹거리를 만드는데 R&D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고 앞선 선진국의 사례를 보아도 그렇다. 노비였던 장영실을 과감하게 발탁하고 곳곳에 숨은 인재를 활용하여 조선을 앞선 나라로 만들었던 세종의 혜안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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