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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09. 2023

너의 이름은..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이 유네스코에 등재되다. 

한자뿐만이 아니라 한글도 알지 못했던 아무개는 매일매일이 희망 없이 사는 존재에 불과했다. 누군가는 그런 말을 했다. 세상에는 형평(衡平)이라는 것이 있어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맞추어준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들 같은 사람들에게는 형평이라는 것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나라가 혼란해질수록 착취는 심해지고 높으신 분들의 학대와 수탈은 더 심해지기만 했다. 양인들이 강화도로 들어왔다는 소리도 들리고 심심치 않게 왜놈들도 보였는데 나라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난 8월 29일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서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특별법에 근거하여 2010년 문화관광부 특수법인으로 설립하여 2022년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 완공되었으며 2023년 5월 24일 동학농민혁명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확정되었다.

이곳은 정읍에 자리한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다. 동학농민혁명 발상지인 전북 정읍시와 고창군이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계기로 학술대회를 열고 당시 기록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름을 말할 때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존재다. 고려시대 조선초까지만 하더라도 광대일을 하던 사람을 재인, 버드나무를 세공하거나 소나 돼지를 잡는 일을 직업으로 하던 천민들인 화척을 합쳐서 백정으로 개명하게 했다. 역사 속에서 백정이라고 불리던 이들은 세종대에 만들어졌다. 

초기에 백정은 지금 생각하던 것처럼 가장 천했던 사람을 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재인과 하척은 본시 양인으로 업이 천하고 칭호가 특수하여 백성들이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보고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평민들과 어울려 살 수 있고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백정이라 불렀지만 차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백성, 백정이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지금도 태어난 환경에 따라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한계가 없고 교육으로서 다른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하지만 어려운 것도 알고 있다. 지금이 그럴진대 150여 년 전에는 어떠했을까. 재인, 화척, 달단, 백정, 칠천반, 신백정, 등록개등 백정으로 규정짓는 수많은 직업들이 있었다. 동물을 잡는 사람만을 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본인이 짓지도 않는 명칭을 통해 규정되고 극심한 차별을 받았다. 그러한 삶은 자식에게 대물림해야 했으며 벗어날 수 없었다.  

아무개는 부모에게 들었다. 200여 년 전에 큰 전쟁이 이 땅을 휩쓸었고 그 후에 이들에 대한 차별과 착취는 더 심해졌다고 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사람이 아닌 짐승으로 살아가던 백성이었던 백정은 동학 농민군들이 내세웠던 세상의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사람이 가장 귀하다는 구호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들이 일어서기 2년 전인 1892년 말 고부군수로 조병갑이라는 사람이 부임해 온다. 그는 2년 동안 기회가 있는 대로 갖가지 명목으로 수탈을 자행했으며 갖가지 죄명을 씌워 그들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았다. 게다가 농민들의 노동력을 동원해서 만든 동진강(東津江)에 건설한 수리시설 만속보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세금을 붙여 농민들을 더 착취하였다. 

견디기가 힘들었던 농민들은 당시 전봉준을 장두(狀頭)로 삼아 군수 조병갑에게 두 차례에 걸쳐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94년 전봉준은 고부관아를 습격하여 조병갑을 몰아내고 고부 · 흥덕 · 고창 · 부안 · 금구 · 태인 등 각처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을 김개남과 모의하여 고부 백산(白山)에 집결시켰다. 

파죽지세로 전국을 휩쓸던 이들은 탐관오리의 숙청, 동학농민군의 참정권 요구, 양반토호들의 탐학 배격, 토지 재분배의 요구, 노비해방 등 반봉건적 개혁요구와 일본세력의 배격 등 1884년 갑신정변 때의 개혁 정강보다도 혁신적인 주장을 하였다.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진압을 하기 위해 청군을 끌어들인 조선 조정은 일본군까지 끌어들인 결과를 낳았다. 아무개의 꿈도 이름이 없어서 동네 개라고 불렸던 사람도, 백정도 모두 일본군에게 학살되었다. 1895년 심문을 받은 후 전봉준은 김덕명 · 성두환(成斗煥) · 최영남(崔永男) · 손화중 등 동지들과 함께 교수형을 받고 최후를 마쳤다. 너의 이름을 물어볼 수조차 없었던 무명인들의 죽음은 사람의 가치가 무엇인지 현재에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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