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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13. 2023

역관의 가문

인조의 시대에서 숙종으로 그리고 장희빈

그녀는 예뻤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사람의 외모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는데 그녀에 대해서는 그렇게 기록을 했다고 한다.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사실 드라마틱한 삶을 살기도 했던 여성이다. 그녀의 가문은 대대로 역관의 명가였고 할아버지는 정 3품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사행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해 후견인이며 큰 아버지이기도 했던 장현의 부는 국가의 큰 거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막대한 재력을 갖추었다. 장현이 효종과 인연을 맺기도 했는데 그로 인해 정 2품 자헌대부를 제수받기까지 했다. 

홍성군에 가면 농업기술센터에서 추진하고 있는 청년들과 함께하는 유기농 마을 오누이권역이 있다. 자연에 로그인하고 싶을 때 찾아가면 좋을 홍성농촌체험관광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가니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며 이야기가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오누이 마을의 입구에 가면 예절교육관이 있는데 이곳에는 오래된 고택을 리모델링과 신축으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예절교육관의 당초 건물의 상량보에는 '숭정기원후 4 성상 13년 갑술 2월 12일 사시상량인좌신향조명유학무오생임봉영목평유학이경원'이라고 쓰여 있다. 

글을 해석해 보면 청나라와의 교체기에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이고 성상이라는 조선조 임금으로 서기력으로는 1634년으로 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에 대들보를 올렸다고 적혀 있다. 그 시기는 1613년에 태어난 역관 장현이 거부로 자리 잡아가고 있을 때였다. 

1634년은 인조가 병자호란에서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기 2년 전이다. 명나라는 국운이 다되어가고 있을 때 이곳에 지어진 건물은 명나라의 시간으로 기록이 되어 있었다.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1년 뒤인 1637년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는데 이때 장현도 사재를 털어 함께 청나라로 가게 된다. 

복원된 현재의 오누이예절교육관은 농업과 농촌을 배우기 위한 숙박시설로 사용이 되고 있다고 한다. 오래된 건물의 느낌과 함께 현대적인 느낌도 있었다. 

원래 집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궁금하지만 건물의 상량보의 글귀가 남아있는 것을 보면 지역에서 재력이 있던 사람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장현이 선양에서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과의 인연으로 왕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안쪽으로 더 들어오면 오누이 커뮤니티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오누이 친환경마을협동조합, 협동조합 젊은 협업농장, 협종조합 행복농장등이 운영이 되고 있다. 문화도시 홍성 시민공유공간 문화터로 이용되는 오누이 다목적 회관으로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군문화특화사업단에서 지원을 하고 있다. 

찾아갔던 날도 행사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식당과 카페, 도서관, 강당등이 조성이 되어 있다. 

다목적 회관으로 들어와서 책들을 살펴본다. 역사책도 적지가 않은 편이다. 앞서 말한 장현이 왕실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었던 1659년(효종 10년) 장현의 동생이었던 장형의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이며 어릴 때 이름은 옥정이다. 성장하면서 뛰어난 미모를 갖추어 경국지색(傾國之色)이었던 장옥정은 장현등과 연관되어 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1680년(숙종 6년)에 승은을 받으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장현이 삼복의 변에 연루되어 있을 때 희빈 장 씨가 힘을 써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장현은 그렇게 승승장구하며 영원할 것 같았지만 1694년 중전에서 희빈으로 강등이 되던 1694년 탄핵이 되어 처음에 경상남도 거제현(巨濟縣)에 정배되었다가 전라북도 부안현의 위도(蝟島)로 이배된후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큰아버지였던 장현이 세상을 떠나고 1701년 사약을 받으며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녀의 나이 4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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