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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25. 2023

옥천의 후율당(後栗堂)

마음속의 뜻을 품고 행동했던 조헌의 공간

무기기술이 발달해서 전후방이 따로 없는 현대전에서도 디달땅이 있으면 버틸 수가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보듯이 전력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에 전역이 점령되지 않는 이상 완전한 승리를 이루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이 교두보로 버틴 곳이 낙동강 이남의 영남지역이었다. 칠곡군을 중심으로 대구등으로 이어진 전선에서 버틴 덕분에 연합군이 들어오는 시간을 벌 수가 있었다. 

옥천 후율당은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을 이끌었던 조헌은 정치적으로 서인이었으며 동인을 정치적으로 공격하다가 이곳에 와 있을 때 서실을 지은 것으로 그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묘에도 배향되고 있다.  옥천 후율당은 용촌리에서 철종 5년(1854)에 백운동에 옮겼다가 고종 1년(1864)에 지금의 자리에 옮겨 1977년에 중수한 후 지금의 모습으로 갖추어진 것이다. 

한국전쟁당시에 영남이 남아 있었다면 임진왜란당시에는 호남만이 남아 있었다. 이순신이 버틸 수 있었던 것도 호남을 지켰기 대문이다. 이순신은 若無湖南 是無國家也(약무호남 시무국가야)라고 하며 호남이 없어진다면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지금도 최대의 곡창지대이기도 한 호남은 일본군이 전쟁에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한 병참기지로서 꼭 필요한 곳이기도 했다. 만약 호남이 점령당했다면 임진왜란은 뛰어난 이순신이었어도 지켜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중봉 조헌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남의 고경명, 김천일, 영남의 곽재우, 정인홍과 함께, 호서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던 사람이기도 하다. 

조헌은 무척 과격한 사람이었다. 주전론자이기도 했던 조헌은 힘은 있어야 지킬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며 꾸준하게 전쟁을 대비하자고 했었다. 임금에게 상소를 올릴 때도 도끼를 함께 가져가서 말을 들어주지 않을 바에야 가져온 도끼로 자신의 목을 치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는 낙향한 후에도 지방관을 하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전쟁에 대비할 것을 촉구했지만 다들 비웃었다.

조헌의 자는 여식 호는 중봉, 도원, 후율이며 본관은 배천이었는데 후율당 안에는 조헌의 충신문과 아들 완기의 효자 정문이 남아 있다. 

조헌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1592년에 결국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파죽지세로 한반도는 일본군에게 점령을 당했다. 이때 의병을 일으켜서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조헌은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이 1차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자 청주성 탈환을 계획하여 관군 및 영규 대사가 이끄는 1000명의 승병과 합세해 청주 전투를 치러 승리를 하게 된다. 

호남으로 병참선을 확장하기 위해 가던 일본군을 막기 위해 금산으로 70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1만 5천 왜군과 2차 금산 전투에서 모두 몰살당하게 된다. 전투 4일 후인 1592년 8월 22일 조헌의 제자인 박정량과 전승업이 조헌을 포함해 전사한 조선군 700명의 유골을 모아 큰 무덤 1곳에 합장하면서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불렀다.

조헌이 금산전투에서 전사하고 난 1년 후쯤 계사년(癸巳年/ 1593) 7월 16일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진(陳)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긴 다음날 희암(希菴) 현덕승(玄德升)에게 올리는 답서에 若無湖南 是無國家也(약무호남 시무국가야)라고 쓴다. 

앞서 호남을 지키기 위한 많은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이순신의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호남을 보호할 것을 주장하는 최후 결전의 일성(一聲)을 한 것으로 보아  군량미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절대적인 요소인데, 그 당시 호남 곡창에서의 군량미 보급은 조선군에게도 일본군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었다. 

벌써 올해의 벼가 익어가고 있다. 황금색 들판에 익어가는 쌀을 보면서 현재는 농업의 차지하는 비중이 무척이나 적지만 한민족은 다 연결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이이를 존경했던 사람이 적지가 않았다. 스승인 이이(李珥)를 경모 하여 그의 뒤를 잇는다는 뜻으로 자기 호를 이이의 호인 율곡(栗谷)에서 율자를 따서 후율(後栗)이라고 지었듯이 그를 따라가려고 했다. 스승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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