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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17. 2023

모시떡과 가을

성북리 오 층 석탑 꽃이 피면 봄을 알고 잎이 지면 가을이네 

왜 호랑이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는다고 했을까. 호랑이가 그렇게 원했던 떡은 서천의 유명한 모시떡이 아니었을까. 모시떡은 덥고 습하여 모시가 많이 재배되는 남부 지방인 전라도나 경상도에서 주로 만들어 먹는 모시는 모시의 원료인 모시풀의 잎을 재료로 하는 떡을 총칭하는 말이다. 그 정도로 맛이 있다면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그런 맛이었을 것이다. 

모시떡을 만나기 위해 가는 여정길은 작은 골의 조용하고 깊숙한 곳으로 벼슬을 버리고 산수를 즐기며 근심을 잊을만한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성북리 오 층 석탑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마을의 벽에는 많은 이야기가 쓰여 있다.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옛사람의 모습이기도 한다. 이곳에 사찰이 있었는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지난 2007년에 있었는데 이곳 주변에서는 발견되지 않았고 저 뒤편에는 마을이 자리하고 있어서 발굴조사는 하지 못했다고 한다. 

서천의 중심지에서 벗어난 곳이지만 서천의 홍원항이나 마량리의 동백나무숲까지 가는 여정길의 중간쯤에 자리한 곳이다.  석탑은 사실 불교라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무덤의 역할을 한다. 스투파는 ‘유골을 안치하고 흙이나 돌로 높이 쌓아 올린 무덤’이라는 뜻으로 석탑을 말하는데 유골을 안치한 것을 탑이라 하고, 안치하지 않은 것을 지제(支提, ⓢcaitya)라고 했다. 

벼슬길에 오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말에서 내리듯이 차에서 내려서 성북리의 석탑으로 다가가 본다. 사람이 죽으면 고인돌과 같은 거대석을 올렸을 청동기시대를 지나고 불교의 창시자인 붓다가 입멸했을 때 시신은 다비(茶毘, 화장)했고, 유골은 여덟 부족에게 분배되었데 이때 부족들은 각각 탑(塔)을 만들어 그곳에 유골을 안치했다. 현재모습의 탑의 시작이기도 하다.  

마을의 안쪽으로 더 들어오면 나무가 혼자 서 있고 안쪽으로 들어오면 석탑을 만나볼 수 있다.  

성북리 오 층 석탑은 부여 정림사지 오 층 석탑을 가장 충실하게 모방하여 만든 고려시대의 탑으로 목조탑에서 석탑으로 바뀌던 시대의 양식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도 가지고 있는데 부여 정림사지 석탑이나 성북리 오 층 석탑도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 사이를 판판한 돌로 막아서 만들어두었다. 

이 정도 완성도를 가진 석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주변에는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오랜 시간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덮혀지고 마을만이 주변에 있다. 

서천 성북리 5층 석탑은 몸돌 위로는 지붕 받침을 올려놓았는데 부여에 가면 볼 수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처럼 별개의 석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의 그 모양을 본뜬 이 성북리 5층 석탑 역시 백제의 석탑 양식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찾아갔던 날도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 아무렇지 않게 옆을 걸어갔다. 가을의 초입에서 이 석탑을 보겠다고 찾아온 사람이 조금 특이했던 모양이다.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시간의 변화를 보여주는 흔적을 자주 찾아본다. 성북리 5층 석탑은 목탑의 형식에서  벗어나 발전된 수법을 보이고 있어 석탑 발달과정을 고찰하는 데 중요한 유구로 주목되고 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는다는 말은 했지만 가지고 있는 떡을 모두 주기까지 계속 요구했을 호랑이는 욕심이 많았다. 꽃이 피면 봄을 알고 잎이 지면 가을인 줄 아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탑과 고려시대에는 모든 백성들이 모시를 제작할 수 있었으며 사원과 관청에 소속된 장인들의 솜씨가 이곳에서 모시떡으로 만들어진 것과는 인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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