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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19. 2023

한용운의 고향

한명회의 후손 시인, 독립운동가로 살다.  

“조선인이 조선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백번 말해 마땅한 일인데, 감히 일본인이 무슨 재판이냐”라고 일본인에게 꾸짖던 사람은 스님이었다. 일본 경찰, 검사, 판사의 심문에 대해서는 시종 꿋꿋한 기개와 정연한 논리로 응대하였으며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의 요구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라는 글을 작성하여 제출하였는데 비밀리에 형무소에서 외부로 내보내는 옷 속에 끼워 밖에 유출되었다. 이 글은 3・1 운동 직후 한민족의 독립선언의 동기와 이유를 논리 정연하게 정리한 최고의 논설로 평가받고 있다. 

충남 홍성군(洪城郡) 결성면(結城面) 성곡리(城谷里) 491번지에서 아버지 한응준(韓應俊)과 어머니 온양 방 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만해 한용운은 청주 한 씨로 집안은 얼마간의 경제적 실력과 유교적 교양을 지닌 농촌중산층 정도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의 가문에서는 이름 있는 무장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가 말했던 조선이라는 국가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핏줄과도 연관이 있다. 위로 올라가 보면 조선 개국 당시 명나라에 파견되어 ‘조선(朝鮮)’이란 국호를 확정 짓고 돌아온 개국공신이 바로 한 상질이다. 한용운은 한명회의 후손인데 한명회가 한상질의 손자다. 

이곳에서 태어난 그의 삶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가 승려가 되려 한 것은 종교적 신앙심 때문이 아니라 불교계를 통해 무엇인가를 해보고자 한 때문이었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은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오래간만에 찾아가 보니 한용운 역사공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의 삶의 행적을 살펴보듯이 걸어볼 수 있는 길이다. 그의 글과 그의 핏줄, 청주 한 씨 등에 대해서 접해볼 수가 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한용운은 세계여행을 계획하고 1905년경 먼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였는데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부두 근방에 숙소를 정하였으나, 그들을 일진회원으로 오인한 교포 청년에 의해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사회가 어지럽고 격랑의 시기가 될수록 서로 반목하고 신념에 따라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서로를 공격하게 된다. 특히 일제강점기와 조선말에는 그 현상이 더 격화되었다. 

지난 일을 뉘우치고 한탄하기만 하면 과거의 노예가 되며 앞으로의 일을 생각으로만 짓고 있으면 미래의 포로가 된다. 간 것은 다시 오지 못하고 오지 않은 것은 미리 끌어오지 못하는 법이다.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를 잃은 자는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이다. 압박을 당하는 사람의 주위는 무덤으로 바뀌는 것이며 쟁탈을 일삼는 자의 주위는 지옥이 되는 것이, 세상의 가장 이상적인 행복의 바탕은 자유와 평화에 있는 것이다." 

지난 8월에는 한용운 생가지 역사공원에서 광복절을 맞이해 겨레의 국화 무궁화꽃을 주제로 올해 처음 개최된 박철마을 무궁화꽃 축제가 열리기도 했다. 

만해 한용운은 노년에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경제적 고난 속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창씨개명 반대와 학병 출전 반대운동을 펼치며 꿋꿋한 지조와 절개로 ‘풍란화의 매운 향내’를 잃지 않으며 살다 광복을 보지 못하고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역사 속에서 다양한 현상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리고 그때는 틀렸지만 지금은 맞는 이야기들이 있다. 지금의 잣대로 과거를 평가할 수 없으며 지금의 잣대로 미래를 재단할 수는 없다. 삼갈 때는 삼가야 하지만 위기가 오면 극복해야 하는 것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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