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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27. 2023

역사가 만든 강원도청

동양문화의 유전자코드와 서양문화의 유전자코드의 공존

1890년 동생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지금 한 점의 밝은 녹색 배경의 장미화 캔버스에 "보라색" 붓꽃 꽃다발을 담은 두 점의 캔버스 작업을 하고 있다. 그중 한 점은 분홍색 배경으로..."그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동생이었다. 평생을 불안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괴로워했지만 동생만큼은 그를 믿어주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었다. 같은 해에 고종황제는 불안한 세계정국에서 유사시에 사용하기 위한 궁궐을 춘천에 세웠다. 

동양의 대표적인 건축물과 서양의 대표적인 건축물이 함께 있는 청사는 많지가 않다. 그중에 춘천에 자리한 강원도청은 그런 공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1890년은 명성황후 시해가 있기 5년 전으로 매우 혼란한 정국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을 비롯하여 민중운동이 봉기하였고 청나라와 일본의 대립이 첨예화되던 시기였다. 이에 고종은 한양에서 떨어진 곳에 궁궐을 짓기로 한다. 

당시 지어진 궁궐은 1941년 원인 모를 화재로 문루인 조양루와 내삼문인 위봉문만 남긴 채 전소되었다. 이후 1957년 근대건축 양식으로 강원도청 본관 건물 2개 층에 전면 기둥에 그리스 고적지의 코린트 양식을 가미해서 지어졌다. 한국전쟁 이후에 지어진 대표적인 공공건축물이다. 

동양건축의 특징이라면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건축 구조라서 주변과의 관계가 중요한 건축으로 발전했고 건축을 통해서 사람과 건축과 주변 자연환경과의 관계에 무게를 두는 디자인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강원도청으로 올라가는 길목의 바닥에는 강원도와 연관이 있는 역사의 흐름을 볼 수 있도록 해두었다. 1457년 6월 영월 유배 10월 죽임을 당한 단종의 이야기, 생육신 관란 원호, 생육신 김시습, 뗀석기, 간석기 등을 따라가다 보면 당시 궁궐의 흔적을 살펴볼 수가 있다. 

공간이 만들어가는 공간은 문화와 흐름의 맥락 속에 계속 변하게 된다. 이곳에 쓰여 있는 역사 속의 이야기도 결국은 변하게 되어 있다. 

대표적인 건물인 조양루는 인조 24년(1646) 춘천부사 엄황이 춘천관아 건물인 문소각을 신축할 때 함께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후 고종대에 국가에서 춘천을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하고 유사시 임금의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해 춘천이궁을 설치하면서 조양루는 문루가 되었다. 

당시의 일본의 행태를 보면 이궁을 설치한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시로 경복궁으로 달려가서 압박하던 일본에서 벗어날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힘의 균형을 추진해 보려던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를 당한 1895년의 이듬해인 고종은 춘천이 아닌 러시아의 공사관이었던 건물로 피한다. 이를 후에 아관파천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俄)'는 당시 러시아의 중국식 표현인 '아라사(俄羅斯)'의 머릿글자다. 

이곳 춘천까지도 올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시기의 급박함이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고 이궁 터에 강원도청사가 건립되면서 조양루는 1938년 우두산으로 옮겨졌다가 2013년 4월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지게 된다. 

강원도청에 적용되었던 코린트 양식은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코린트에서 발달한 건축 양식으로 기둥머리에 아칸서스 잎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코린트식을 보면 화려하고 정교한 것을 볼 수가 있다. 묘하게 코린트의 화려한 느낌은 살아 있는 반 고흐의 그림 속 꽃다발과 닮아 있었다. 춘천에 이궁이 설치되던 해인 1890년에 마지막 붓꽃 정물화를 그린 반 고흐는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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