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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Oct 08. 2023

최영의 파란만장

홍성군 흥북면에 자리한 최영장군의 사당

최 씨의 고집을 이야기할 때 선입견을 만든 대표적인 사람으로 최영장군이 있다. 사실 모든 사람에게 고집이 있다. 사람 성향에 따라 차이가 날 뿐이지 성씨에 따라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최영장군의 본관은 일반적인 최 씨의 본관인 경주가 아닌 철원이다. 최영의 집안은 5대조 최유청(崔惟淸)이 고려 예종 때 집현전 대학사를 지낸 이후로 대대로 문관에 오른 문벌 가문이었다. 최영이 태어났을 때 이미 고려는 파란만장한 쇠락시기를 맞고 있었다. 

충청남도 홍성에는 최영을 모신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차를 세우고도 급한 경사를 올라가서 만나볼 수 있는 최영 사당이다. 최영이 성장할 때는 원나라의 끊임없는 내정간섭과 왜구들의 노략질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왕실은 주체적으로 운영이 가능하지 않았으며 백성의 삶은 피폐해져 갔다. 이때 최영은 관군을 이끌고 나가 진압을 하며 백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그는 아버지에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유언을 듣게 되며 이를 평생 실천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가 고려를 지탱하는 대들보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바로 공민왕 때다. 공민왕은 고려말의 개혁군주이기도 했다. 경사가 상당히 심해서 걸어서 올라가다 보면 허벅지에 약간의 자극이 오기 시작한다.  

고려말에 원나라는 그 힘을 잃어갔고 새로운 세력인 명나라가 떠오르고 있었다. 공민왕 이후에 고려 우왕은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는 명나라를 정벌하고 싶어 했고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은 최영장군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다. 최영이 성장하도록 도운 이성계는 이미 뜨는 별이 되어 있었다.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반대했는데 많이 알려진 4가지 불가론을 내세운다.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세가 약한 명나라는 당시 주력군을 몽고 방면으로 출정 보낸 상태였다. 무리한 공물요구와 함경도 이북에 철령위를 둔다는 명나라의 태도는 요동정벌로 방향을 정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공민왕대에 정권을 농단했던 신돈은 많은 충신들을 유배 보냈는데 이때 최영도 참소로 경주윤으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6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이후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던 최영은 고려 최고위치에 오르게 된다. 1376년(우왕 2) 왜구가 연산(連山)에 침입했을 때 원수 박인계(朴仁桂)가 참패해 전사하자 최영이 직접 나섰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힘의 균형을 바뀌게 된다. 아무리 청렴했다고 하나 최영은 귀족 출신으로 왕의 장인이었으며 기득권이기도 했다. 당시에 다른 기득권들의 폐해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성계는 신흥 세력으로 친명파였는데 정치세력의 소용돌이에서 역사는 그의 편이 되어 주지 않았다.  경기도 고양에 있는 최영 장군의 무덤은 오랫동안 풀이 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기봉사안에는 최영장군의 영정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초상화는 실제 최영장군의 초상이 아닌 무신도의 도상을 원용하여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모습이다.  무속에서는 최영장군을 수명장수와 태평의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평생 여색과 재물을 멀리하였던 최영은 1388년 문하시중의 자리까지 올라갔다가 회군을 한 이성계에 의해 경기도 고양에 유배되었다가 개경으로 소환된 뒤 죽임을 당하면서 고려의 국운과 함께 저 벼렸다. 최영장군의 죽음뒤에는 고려의 왕씨성을 가진 사람은 모두 유배를 보냈다가 죽여버린다. 조선을 세운 후에 왕씨들은 대부분 수장이 되어 성을 바꾸어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만 남아 있다. 충남 공주의 왕촌천이라는 작은 천은 그중에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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