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Nov 01. 2023

구미의 仁同

도호부라고 불리기도 했던 공간의 인동향교와 동락서원

하늘에서 내려온 붉은 옷을 입었다고 알려진 남자가 있었다. 출귀몰한 전술 및 붉은 옷을 입은 장수에 산신령 같은 뭔가 도인스러운 신비한 인상이 성리학자라기보다는 무인에 가까웠다. 한가로이 시를 읊고 술과 낚시로 세월을 보내던 시골 선비로 매일매일을 그냥 책이나 읽고 시간을 보내기만 했다. 평생 은거하며 살려고 했던 곽재우에게 전쟁 소식이 전해진 것은 1592년(선조 25) 4월 13일에 일본군이 부산포를 점령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구미의 인동이라는 지역은 작은 지역이지만 도호부라는 높은 품계를 받기도 했었다. 앞서 말했던 곽재우가 이별을 일으켜 왜적을 크게 무찔렀기 때문이다. 이기고 지는 것은 지역과 상관이 많지는 않지만 가까운 곳에 상주라는 도시는 임진왜란 당시 대패하여 경상북도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구미의 인동향교는 조선 중기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가 현재의 향교는 1864년(고종 1)에 중건된 것이다. 옛 교육이관인 향교는 고종대에 인동국민학교의 전신인 옥성학원(玉城學院)이 설립되어 명륜당을 교사로 쓰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6칸의 대성전, 8칸의 명륜당, 신도문(神道門)·외삼문(外三門) 등이 남아있다. 구평동 별빛공원에서는 인동동 주민자치 활성화 사업의 하나로 ‘인동 문화축제’가 '제7회 인동·진미 도시숲 축제'와 연계해 진행되기도 했었다. 

인동이라는 지역은 본래 신라의 사동화현(斯同火縣)이었는데 뒤에 수동(壽同)으로 고쳤다가, 757년(경덕왕 16) 인동이라 고친 곳이다. 지형상 금오산에서 뻗은 산줄기가 건대산(件代山)ㆍ옥산(玉山)ㆍ천생산(天生山)ㆍ유악산(流嶽山)ㆍ황학산(黃鶴山) 등에 이어지면서 인동 전체를 감싸고 있다. 

인동향교의 입지는 낙동강의 풍광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인동의 중앙부를 낙동강이 관류하고 있으며 강변에는 인풍루(仁風樓)ㆍ망호로(望湖樓) 등의 누정이 있었고, 중지창(中旨倉)은 인동의 세곡을 모아 낙동강 하류로 실어 날랐다.

보발로 양원참(楊原站)이 있었고, 양원역과 동안역(東安驛)을 통하여 대구ㆍ군위ㆍ개령 등지와 연결되었던 곳이어서 지리적으로 인동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동의 낙동강 옆에는 구미의 대표 공원 중 한 곳인 동락공원이 조성이 되어 있다. 살다 보면 에너지가 넘쳐서 긍정적인 사람이 있고 에너지가 부족해 유독 맥이 빠진 사람이 있다. 영혼의 힘은 주역에서도 표현하고 있다.

인동향교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동락서원과 동락신나루가 자리하고 있다. 

낙동강을 건네주었던 이곳은 과거에 주막촌 같은 곳이 만들어져 있지 않았을까. 다리로 넘어가기에는 큰 강이어서 낙동강에서 많은 사람들이 업을 삼으면서 살았다. 

이 부근에서 크게 왜군을 물리쳤던 곽재우는 당시 의병 모집을 핑계로 세력을 모은 이몽학(李夢鶴) 등이 1596년(선조 29)에 난을 일으키면서 이름이 거론이 되었다. 게다가 통제사 이순신이 죄 없이 잡혀 오는 것을 보고서는 더욱 관직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몇 번이고 벼슬길에 올라오라고 했으나 고향에 은거하면서 살다가 광해군대에 1613년 영창대군 사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완전히 정치권과 멀어지게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을 기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