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Nov 06. 2023

고려 (高麗)

구미에 자리한 고려말 학자 야은 길재 묘소 

국가가 망하는 때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까. 대한민국의 영어 이름이며 한국의 문화와 다양한 매력에 붙은 K라는 수식어를 붙이게 한 나라는 바로 고려다.  474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1392년 멸망 때까지 34명의 왕 씨 출신 국왕이 있었던 왕조는 통일신라가 쇠락하면서 지방에 있었던 호족세력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백제를 잇는다는 후백제와 신라앙조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궁예는 고구려를 잇는다는 의미로 고려라고 정했다. 

중국 황화강의 지주라는 바위는 천만년의 거친 물결 속에서도 그 위용이 변함없이 준엄한 모습을 가지고 있음은 백이숙제와 길다 하여 지주 중류비라고 세워져 있다. 

조선 선조 20년에 인동현감 류운룡이 야은 길재의 높은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 지주중류비다. 뒤편에는 예조판서 류성룡이 지주중류의 뜻과 그것이 후학들에게 주는 교훈을 적은 야은 선생 지주비 내용이 음각되어 있다. 원래의 비석은 홍수로 매몰되고, 지금의 비석은 정조 4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지주중류비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려말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야은 길재의 묘소가 있다. 본관은 해평,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 구미의 대표적인 여행지인 금오산에 가면 그의 흔적을 살펴볼 수가 있다. 

신라말기 후삼국시기에 인기를 끌었던 궁예는 계속된 실정으로 개성 출신의 호족이었던 태조 왕건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 고려 전기 사회는 중앙이 지방을 일방적으로 지배하지 않고 중앙과 지방이 공존하였다. 몇 백 년의 시간이 지나 공민왕이 즉위할 무렵에는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크게 변화하였다. 그때 태어난 사람이 야은 길재다. 야은 길재는 11살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정몽주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성리학자로서 자리를 잡았다. 

구미에 자리한 야은 길재선생 묘소는 구미 오태동에 자리하고 있다. 오태는 한자로 나라 이름 '오(吳)', 클 '태(太)' 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나라 이름 '오(吳)'자가 아니라 까마귀 '오(烏)' 자로 보고 있다. 조선 성리학의 학맥은 정몽주로부터, 길재,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등으로 이어졌다.

시끄러운 음악등을 켜두고 앞에서 단어를 글자를 입모양으로 알려주고 끝사람에 갔을 때까지 맞추는 게임이 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그 말뜻이 전달되지만 끝사람에 가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의 생각이나 국가의 시작이 그러하다.  야은 길재는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고려 말의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경북 구미시 고아읍 봉계리(鳳溪里, 현 봉한리 525-1, 유허비 소재)에서 태어난 야은 길재는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구미 선산에 내려와 학문에 힘썼다. 그러던 야은 길재는 세종이 즉위하던 해인 1419년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신라, 고려, 조선, 대한민국까지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사람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자신만의 소신을 가지고 사회의 리더가 되느냐에 따라 국가의 흥망성쇠는 달라지게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스터 가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