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Nov 09. 2023

청주의 가문

고인쇄박물관 청주 지역문중 소장유물 특별전

예로부터 사람들이 가문을 이야기하는 것은 가문으로서의 특별 대우 같은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내려오는 정신이라던가 교육 혹은 삶의 철학의 뿌리가 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부권에서 유력가문이라고 할 문중들이 많이 머물렀던 곳은 바로 청주다. 청주는 아래로 내려가면 전주, 상주, 위로 올라가면 충주, 원주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수많은 가문들이 뿌리를 내리면서 살았다. 

충북 청주고인쇄박물관은 2일부터 2024년 2월 12일까지 근현대전시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인다호걸(人多豪傑), 청주의 명가’를 주제로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전시 제목인 ‘인다호걸(人多豪傑)’ 네 글자는 고려 태조가 청주를 지칭한 말로, 청주 지역이 예로부터 땅이 비옥해서 인재를 많이 배출한 살기 좋은 고장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청주지역에 세거하고 있는 17개의 문중이 참여했다. 

청주지역에 터를 잡아 살아오고 있는 많은 문중들은 소중히 지켜왔던 조상들의 유품과 기록물을 후손들에게 공개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전시를 요청했고, 박물관은 문중들의 자료를 조사해 시민들에게 공개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던 것이다. 

신숙주 초상과 신절분재기(고령신 씨), 천과방목 판목(밀양박씨), 노비호패(은진송씨), 을축갑회도(여흥민씨), 윤관초상(하동정씨) 등 120여점이며, 문중의 큰 특징을 충(忠)과 효(孝)를 주제로 구분해 두었다. 

은진송씨는 가까운 지역의 대전에도 뿌리를 내렸지만 청주에도 적지 않은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청주는 논산과 같이 너른 땅에 많은 인물을 배출한 곳이었다.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세종실록에 나오는데 열두 성씨가 처음 등장한다. 대표적인 성씨는 밀양박씨, 안동권씨, 하동정씨, 여상송씨, 밀양박씨, 동주최씨, 여흥민씨, 청주한씨, 상주박씨, 교하노씨, 안정나씨, 보성오씨, 경주이씨, 고령신씨, 은진송씨, 기계유씨등이다. 

이곳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문화재는 교지다. 교지는 조선시대 국왕의 명령 및 의중을 담은 언사, 또는 국왕이 관직 등을 내리는 문서 가운데 첫 행에 ‘교지(敎旨)’라고 표기하는 문서군을 지칭하는 용어를 통칭한다. 

지금은 많이 퇴색되었지만 효는 인륜의 첫걸음으로 국가를 지탱하는 중요한 의미이기도 했었다. 가문에서 선조의 가르침은 대대손손 끊이지 않는 물줄기와 같이 영원한 것이었다. 자신의 뿌리를 찾고 조상의 은덕을 기억하기 위해 족보를 새겨 후대에 전하는 일도 효를 실현하는 길이었다. 

교지를 받을 정도라면 뼈가 있는 집안이었다. 조선은 국초부터 국왕의 명령이 담긴 말을 ‘교(敎)’라고 칭하였다. ‘지(旨)’는 여기에 담긴 국왕의 의중을 가리킨다. 문서의 형식은 첫 행에 ‘교지’라고 적고, 본서 본문은 수취자의 이름과 국왕이 사여하는 관직, 물품, 특권의 내역을 적은 후 ‘~자(者)’로 마감하였다. 

가족의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때의 생활상을 엿볼 수가 있다. 문중은 하나의 집단으로서 지역사회의 여러 의례 행사에 참가하며 문중의 중심은 직계장손 집안의 호주인 종손이나, 연령 · 항렬 · 학문 · 인품으로 보아서 대내외적으로 대표자격인 문장을 선출하게 된다. 

시대가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제 문중이라던가 가문의 모습은 과거와는 달라질 것이다. 사회적 위세를 과시하기 위하여 문중의 중심인물로 가장 높은 관직을 지닌 조상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이제는 현재의 중요성이 더 커질 듯하다. 

양반 문중의 활동 중 많은 부분이 유림행사와 겹치게 된다. 유림의 행사로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각 서원에서 봄과 가을에 행하는 향사(享祀)였다.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영정으로 남겨져 있고 초상화로 그 모습을 남겨두어 그 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제는 가문에서 보관하던 것들이 공공의 공간으로 옮겨져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개가 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가문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는 것을 그만큼 경제적인 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다. 부는 봉제사를 위한 위토뿐 아니라 선비들을 양성해 내는 서원 창립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재산을 나누어주었던 재산 분배기였다. 내용은 봉사조와 자녀별 노비, 토지분급 내역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노비는 자식까지 자세히 기록하여 다툼이 없도록 하였다. 신절 분재기에서는 1녀 허류, 2남 필한, 3남 위한, 4녀 이제렴, 5녀 황유서, 6남 조한, 7남 석한에게 사내종, 계집종, 논과 밭을 어떻게 분배했는지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사회에서 가족은 부계계승의 원리를 따라 먼 옛날의 시조에서부터 무수히 많은 조상들을 거쳐 현재에까지 이르렀다. 여러 세대에 걸쳐서 이룩된 생활양식이 얼마나 확고하게 정립되어 전통으로 뿌리내렸는지 아는 것이 가문의 흔적이다. 

"분하고 바늘 여섯을 사서 보내네, 집에 가 못 다녀가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에 있을고, 울고 가네, 어머니와 아기를 모시고 다 잘 계시소, 내년 가을에 나오고자 하네." - 500여 년 전 아내에게 보내는 한글 편지


매거진의 이전글 원주의 원도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