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의 춘포역과 마을, 일본인들의 살았던 흔적들
사진을 찍고 보니 그리고 있는 그림과 어딘가 많이 닮아 있는 느낌이 든다. 일본인들이 촌을 형성하고 살면서 큰 시장이 형성되었던 이곳은 익산의 춘포라는 지역이다. 큰 대에 마당 장자를 쓴 지역인 대장은 큰 뜰이라고 해서 일본인들이 대거 이주해서 살았던 곳이다. 일본인들의 촌이 인위적으로 생긴 곳으로 많은 물자가 이곳을 드나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춘포라는 지역명이 있는 이곳은 지금도 대장역의 대장을 사용하는 건물들도 적지가 않다. 도정공장을 비롯하여 만경강 옛 뜰길과 카페, 구 일본인 농장가옥까지 이곳에 남아 있다.
한국에 기찻길이 깔리고 기차가 들어서게 된 것은 1899년으로 경인선이 개통되면서부터이지만 경인선의 경우는 목조건물의 형태가 아닌 간이 정류장 형식의 기차역이었다. 그리고 서울의 젊은이들이 몰려사는 신촌에 1921년에 기차역이 세워졌는데 그보다 더 빠른 1914년에 전형적인 기차역의 모습을 갖춘 것은 바로 이 춘포역이다.
지금은 한적한 농촌의 모습이지만 춘포역(과거 대장역)의 앞에는 창고와 마구간이 11개나 있었으며 규모가 상당히 큰 정미소도 지금도 남아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수탈을 위해 만들어진 기차역이기도 한 춘포역에서는 오프라인형 대규모 역할수행게임(MMO RPG)인 '춘포 1914: 사수(泗水)하라'이 주어진 임무가 수행되고 있다.
'사수하라'의 '사수(泗水)'는 현재의 만경강을 일컬었던 말로,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1914년 만경강변의 춘포를 배경으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게임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실감 나는 게임 연출을 위해 도우미를 공간마다 배치했으며 역할 또한 지역 주민과 배우들이 직접 맡으며 생동감을 더했다고 한다.
춘포역의 안으로 들어가 본다. 조금 더 일찍 도착했다면 게임에 참여해서 실제 화폐와 교환해 주변 상가의 특산품, 먹거리, 유료 체험에 활용하거나 기념품으로 교환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기만 하다.
이곳에 교통수단은 버스도 없었으며 오로지 기차만 있었다고 한다. 풍요로운 대지 때문에 일제 강점기 시절 수탈과 아픔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의 기억은 잃어버렸지만 춘포(春浦)는 ‘봄 나루’라는 뜻으로 강 따라 군산까지 배가 드나들던 춘포 나루가 있던 곳이다
1914년 지어진 후, 2011년 폐역이 될 때까지 100년가량 운영되던 춘포역. 춘포 들판에서 수확한 쌀을 군산으로 보내던 수탈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는 않지만 열차가 운영될 때의 시간표와 운임을 볼 수가 있다,. 이제 1,000원이라는 단위도 점점 사라지는 느낌마저 든다.
춘포면사무소에서 만경강 방향으로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예쁜 카페이면서 춘포청년회관으로 사용되고도 있는 이곳은 춘포를 찾는 사람들에게 핫플레이스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제 강점기 시대, 수탈을 목적으로 곡식을 생산하던 이마무라 농장이 있었던 곳이다.
조금 더 걸어서 안쪽으로 들어오면 볼 수 있는 오래된 2층 목조 주택은 일제강점기 시절 호소카와 농장의 관리인이었던 일본인 에토가 1940년경 지은 집으로 아픈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이다. 1940년대에 지은 일본식 가옥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춘포역과 더불어 등록문화재 제211호로 지정됐다.
대장도정공장은 춘포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호소카와농장의 도정공장으로 호소카와 가문은 일본에서도 명망이 있는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인들이 지은 이름이었기에 춘포역의 원래 이름은 ‘오오바역(おおばえき)’으로 불렸다. 춘포를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봄개, 즉 봄 나루란 의미로 봄뿐만이 아니라 가을에 와도 정겨운 분위기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춘포역을 통해 전주와 익산으로 통학했던 학생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