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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Nov 21. 2023

성주사지 (聖住寺址)

비가 오고 사라졌지만 쓸쓸하지 않은 백제시대의 절터

살다 보면 비가 오는 날도 있고 안개가 끼기도 하고 눈이 와서 거동이 힘들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이다가 보면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볼 때가 있다. 한반도에  선(禪)이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신라 헌덕왕(809~826) 이후로 도의와 홍척이 당에 가서 마조도일 문하인 서당 지장의 선법(禪法)을 전해 받고, 각각 821년과 826년에 귀국한 이후부터 신라에서 선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 후 당에서 조사선을 전해 받은 유학승들이 계속 귀국하면서 9 산선문(九山禪門)을 형성하게 된다. 

보령의 성주산자락에는 그 선문의 아홉 파중 하나인 성주산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성주산문을 비롯하여 아홉 파(派)는 가지산문, 실상산문, 동리산문, 희양산문, 봉림산문, 사굴산문, 사자산문, 수미산문이다. 선이란 범어로는 디야나(dhya-na), 팔리어로는 쟈나(jha-na)이다.

인도의 전통적인 선은 요가이다.  심사(深思)·묵상(默想)에 의한 마음의 통일을 구하는 방법이 요가에 있다. 우주의 원리인 브라흐만과 개인 속에 있는 진리인 아트만의 일치를 꿰뚫어 보는 수행으로 정착되어 갔는데 불교와 요가선은 특유의 선사상으로 발전을 해나가게 된다.  

비 오는 날의 성주사지는 선에 대해 다시 돌아볼 수 있게 하는 공간이었다. 선의 원류는 인도에 있으며 인도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완전히 꽃을 피운 곳은 중국이었으며 보령의 성주산과 같은 곳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성주산파를 개산 한 무염도 그 조부 때에는 진골(眞骨)이었으나 아버지 범청(範淸)에 이르러서는 6두품(六頭品)으로 그 신분이 1등급 하강되었다. 

현휘(玄暉, 879~941)는 무염의 제자 심광(深光,?~?)에게 출가하고, 906년에 당에 가서 석두 희천 문하인 구봉 도건(九峰道虔)의 선법을 전해 받고 924년에 귀국하여 고려시대에 국사가 되었다고 한다. 

삶에서 미래는 보이는 것 같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예전에 알던 것과 다를 때가 많다. 마치 안개가 자욱하게 껴있는 성주산의 모습처럼 말이다. 성주사지를 자갈소리와 함께 걸으며 오랜 시간의 흐름을 다시 되돌아가본다. 

한 사람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으로 이전되어 가고 하나의 정신체계로 확립이 되기도 한다. 폐사지가 보여주는 황량한 공간을 넘어 아름다움을 대표할만한 유서 깊은 절터에는  한때 2000여 명의 승려가 머물며 수도하던 절로 손꼽였던 곳이다. 

성주사지에는 국가 지정 문화재인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국보)를 비롯해 성주사지 오층석탑(보물),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보물) 등의 문화유산이 남아있다.

성주사지 천년 역사관은 이미 두어 번 가본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선문의 관점으로 성주사지를 바라보았다. 사람의 정신이란 육체에 스며들어 있지만 어떤 한계는 없다.  오래된 건물의 잔재만이 있지만 생각의 틀은 아직도 남아 있다. 

수행의 종교이기도 한 선은 마음 챙김 등 다양한 명상 수행법이 확산되고 있고, 최근에는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중심으로 언택트 명상과 요가는 이어져 있다. 

공통점을 찾아가고 공감을 할 수 있는 것이 선을 관통하는 포인트가 아닐까. 폐사지이지만 폐사지 같지 않은 보령 성주사지에서 안개로 인해 경계가 흐릿하지만 오히려 마음이 맑아지는 그런 느낌이 든다.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 자신만의 닻을 내리듯이 차곡차곡 쌓아올린 삶의 탑처럼 모든 것은 언젠가는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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