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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Dec 05. 2023

가을의 경주

동시대 선덕여왕의 모전석탑과 무왕의 미륵사지 석탑

진평왕에게는 마야부인과의 사이에 아름다운 미모의 딸들이 있었는데 덕만공주(德曼公主), 천명공주(天明公主), 선화공주(善化公主)다. 이 세명에게는 모두 남다른 인연들이 있었다. 역사 속에서 명확한 사실에 대한 부분을 뒤로하고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셋째 딸인 선화공주는 절세미인이었다는 소문이 퍼져 백제의 서동이 신라의 수도로 몰래 들어와서는 아이들에게 마[薯蕷]를 나누어주어 환심을 샀다는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신라의 고도였던 경주로 가면 도심 한가운데에 소박해 보이는 사찰이 있다. 처음에는 저곳을 들어가 볼까란 생각이 드는 사찰이지만 이곳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찰이다. 분황사의 분황(芬皇)은 선덕여왕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향기로운 임금이라는 표현으로 선덕여왕을 상징하기도 하는 사찰이다. 

590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덕만공주는 훗날 백제의 무왕이 될 서동과 비슷한 연령대인 것으로 보인다. 백제무왕의 탄생연도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동시대에 한 명은 신라의 여왕으로 한 명은 백제의 어라하였다. 분황사라는 사찰은 634년(선덕여왕 3) 정월에 창건되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분황사의 주변으로 탁 트인 이곳에는 많은 유물들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쭉 뻗은 도로 위에 멀리 경주의 고도와 흔적이 그려지는 것만 같다. 설화 속에서 선화공주와 결혼을 하게 된 무왕은 덕만공주와 매우 가까운 사리였다고 볼 수가 있다. 선덕여왕보다 일찍 왕위에 오른 무왕은 백제를 부흥시키기 위한 다양한 행보를 보인다. 

이제 분황사의 입구로 들어가 본다. 불교진흥을 통한 왕권 강화를 위한 포석으로 자장과 원효를 주석시키기도 했다. 분황사가 역사적으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모전석탑 때문이기도 하다. 분황사 창건과 합께 선덕여왕 3년 (634))에 같이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9층규모로 지어졌지만 현재 3층만 남아 있으면서 남아 있는 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날이 상당히 좋았던 날 분황사의 입구에 들어오면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모전석탑이다. 모전석탑의 앞에 자리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익산의 미륵사지에 가면 미륵사지 석탑이 있는데 그 석탑은 이 모전석탑이 건립된 것보다 5년 후인 무왕 40년(639)에 만들어진 것이다. 두 개의 석탑을 보고 있으면 비슷한 느낌이 풍긴다. 규모는 미륵사지 석탑이 더 크지만 9층석탑으로 건립된 것과 지금은 윗부분이 사라진 것도 비슷하다. 

진평왕에게는 첫째 딸은 천명공주였지만 왕위는 둘째인 덕만공주가 물려받게 된다. 천명공주는 김유신과 함께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태종무열왕을 낳는다. 선덕여왕은 태종무열왕에게 이모다. 신라가 삼국통일 이전 황룡사, 흥륜사와 함께 경주에 조성한 칠처가람(七處伽藍) 가운데 하나인 분황사는 1990년부터 2014년까지 진행한 절터 발굴조사를 통해 신라 최초의 품(品) 자 형태 일탑삼금당(一塔三金當·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쪽에 법당을 둔 양식) 양식으로 건설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분황사에는 현존 당우로는 보광전·승당·종각이 있으며, 이밖에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분황사화쟁국사비부(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분황사석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석등·건물지의 초석 등이 남아 있다.

분황사는 다른 사찰처럼 산속에 자리하지 않고 평지에 있어서 가볍게 관람하기에 좋은 사찰이다. 동시대에 살았던 선덕여왕과 무왕은 그렇게 관계가 좋지는 못했다. 무왕이 공격적으로 백제의 영역을 확대해 나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사 속에서 많은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고 정확하게 그 역사적 사실이 적혀 있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역사 속의 내용이기도 하다. 경주 시티투어의 대표코스로 항상 관람객이 북적이며 공식 해설사가 있어서 항상 많은 소리가 들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분황사의 모전석탑의 단층의 기단은 자연석으로 높게 쌓았으며, 그 위에 화강암으로 탑신받침을 마련하고 탑신을 쌓았다. 1층 탑신 4면에는 각각 감 실을 만들고 문비를 달았는데, 감실 속에는 불상 같은 예배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진평왕의 아름다운 딸 세명은 역사 속에서 한 명은 여자 임금으로 한 명은 삼국통일의 주역이 된 아들을 낳고 다른 한 명은 백제로 떠나 왕비가 되었다. 때론 역사 속에서 확실한 진실보다 그들의 이야기에 더 마음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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