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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Nov 18. 2023

新 계급사회

존재하지 않지만 공존하는 사회를 만드는 노력

사람들에게 잉여생산물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제도가 생기고 부족국가에서 봉건국가로 변화하게 되었다. 지구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모두 계급사회가 만들어졌다.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은 반복되어왔다. “최상의 공화국 형태와 유토피아라는 새로운 섬에 관한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한 대단히 훌륭한 소책자”라는 원제목의 소설은 토머스 모어가 쓴 작품으로 유토피아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였다. 그런 국가는 영원한 이상향에 불과하다.  유토피아의 어원은 그리스어에서 "아니다, 없다"를 뜻하는 '우 (οὐ-)'와 "장소"를 뜻하는 '토포스 (τόπος)'가 합쳐진 단어로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전국의 구석구석을 다니다 보면 지방의 변화를 직접 마주하게 된다. 인구의 감소로 인해 폐허가 되다시피 한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지방의 인구가 얼마나 빨리 줄고 있는지 보여주며 대학교조차 학생이 없어서 문이 닫힌 채로 있고 그 앞에 있는 빌라건물들은 을씨년스럽게 빈방이 넘쳐나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우연하게 지방의 학교를 방문했을때 생각보다 외국인 자녀들이 많은 것을 보고 지방에서의 현실은 외국인들의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실 대한민국은 인구의 자연감소가 시작된 이래로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이 줄어들었다. 2023년을 기준으로 주거불분명으로 주민등록이 말소된 사람까지 포함한다면 인구의 20여만 명이 줄었다고 한다. 계속 빠르게 줄고 있지만 평균연령이 높아지면서 어느 정도의 인구규모는 유지가 될 수 있지만 사회에 많은 변화를 만들게 될 것이다. 서울과 수도권만 인구규모를 유지할 수 있고 지방은 광역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상당규모로 인구가 줄어들면서 그 빈자리의 상당수는 외국인근로자가 채울 것이고 이는 미래에 생각하지 않았던 갈등을 만들 것으로 보인다. 


중력은 규모가 큰 우주를 유지하고 조정하는데 질량은 언제나 끌어당기는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 테리 프래쳇 영국의 소설가로 디스크월드와 멋진 징조들(닐 게이먼과 공저)를 쓴 작가로 J.K. 롤링이 쓴 해리포터 시리즈를 내놓기 전까지 영국 내에서 제일 많이 팔린 소설의 작가이기도 하다. 이 말한 것처럼 지구를 유지하는 중력은 떨쳐내기 힘든 습관이라는 것은 사회에서도 적용이 된다. 대도시로 사람이 몰리면 몰릴수록 밀도가 높아지면서 기회의 중력이 커지며 결국에는 사람들을 더 많이 빨아들일 것이다. 한국에서 서울과 수도권에 사람이 더 많이 몰리게 되는 이유다. 우리는 계급사회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공간의 계급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서울의 강남이 꿀 발라 놓은 것처럼 유토피아적인 공간이라기 보다는  그들만의 리그가 만들어지고 공고한 학벌사회로 진입해서 더 많은 기회를 얻으려는 욕구 때문이다. 


앞으로 지금까지의 양상과는 다른 신 계급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처벌방지법등과 같은 것도 나오겠지만 사람은 다른 사람과 그룹 지어서 차별화된 대접을 받으려는 욕구를 막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의대블랙홀은 더욱더 심화가 될 것이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더 좋게 바꾸는 창의적인 분야로 나가려는 사람들보다 지속적으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직업군만 선호하게 될 것이다. 아파트를 지을 때에도 임대하는 아파트의 수를 줄이고 그 공간에 구분을 두려고 하며 선호하는 역세권에 청년들이 거주하는 주택조차 건설하는 것을 막는 것이 한국인들이다. 영화 헝거게임에서 전쟁등으로 인해 폐허가 된 대륙에 판엠이라는 국가가 세워지며 그 중심에는 수도인 캐피톨과 12 구역으로 나뉘어 있어 소득이나 신분에 따라 구분이 되는 사회가 등장한다. 숫자가 많아질수록 정주환경은 더 나빠지며 구역간의 이동은 특별한 사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한국은 헝거게임속 세상처럼 구역이 구분되어 있지 않고 거주이전의 자유가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경제적인 장벽이 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다. 경제적인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사는 것조차 거부하는 사람들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서는 관대할 수가 있을까? 


외국인 근로자는 이미 지방에서는 그 수가 상당히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몸소 체감하고 있다. 아래에 자리한 남해의 김해라는 도시만 가더라도 외국인들이 생활권을 유지하면서 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 아이들이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교육의 질이 뒤처지는 것을 좋아할 만한 한국인 부모는 많지가 않다. 결국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공동체를 형성해서 힘을 가지게 되면 추후 계급 간의 갈등처럼 불거지게 될 시기가 올 것이다. 이미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 사는 거주지역에 대한 혐오도 생겨나고 있다. 


조금은 먼 미래겠지만 로봇이 지금 단계를 넘어서서 사람들에게 움직이는 자산이 됨을 넘어서 기본적인 권리를 가지게 될 날도 오게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계급은 명확하게 형성이 것이다. 원하지 않아도 계급간의 갈등은 상황에 따라 범죄의 모습으로 부각되어 사회의 심각한 병폐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한국은 전국토의 균형발전을 해서 살만하고 아이를 낳아서 키우기 좋은 사회가 되는 단계를 지나쳐버렸다. 이미 블랙홀처럼 서울과 수도권의 질량이 너무나 커져버렸고 표를 얻으려는 정치인들은 GTX a, b, c, d와 같은 대규모 개발을 통한 교통망을 만들어 서울로 빠르게 진입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필요한 사람을 쉽게 구하려는 대기업들을 위해 수도권의 규제완화는 더 많이 해줄 것이다. 


공간에 대한 계급, 인종에 따른 계급, 존재에 따른 계급등은 더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서 학력이 시원치 않은 사람에 대한 멸시는 다른 부분에서 낮은 수준의 집단보다 훨씬 두드러진다. 주홍글씨처럼 새겨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미 그 격차는 스스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그에 따른 사회적 성공 및 실패도 그렇게 받아들여지게 된다.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든 아이들에게 그 출신 가정과 무관한 교육, 문화적 기회, 경제를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보장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봉건국가의 귀족제 사회보다 능력주의 사회가 평등할 것이라고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보이지 않기에 그걸 바꾸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정치권에서 저출산 대책위를 만들면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이미 본질은 보지 않고 언발에 오줌누기식으로 땜질 처방만을 하는데 말이다. 그리고 이미 사회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은 지나갔다. 신계급사회가 만들 사회적 갈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이며 사람들의 욕구를 어떻게 순화할 것인가가 미래에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책정도일 것이다. 사람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관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는다면 백약이 무효가 될 것이다. 계급간의 논쟁은 기회와 평등이라는 원칙에서 출발하여 일자리, 교육, 출산, 주거환경등에 대한 접근 기회가 어떤가를 놓고 벌어지게 된다. 


경제적으로 상류층과 하류층의 자녀가 똑같이 성실하고 양심적인 부모가 일상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살고 있는 주거환경과 가정환경에 따라 자원, 인맥, 관심, 지원등이 평등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 나서 학교, 직업등을 선택하는데 공평한 기회가 주어졌다고 치면 계급이 구분되지 않는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질 수가 있을까. 신 계급사회에서 적용되는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정당화하며 배고픈자들의 게임이라는 헝거게임에서처럼 절대 넘어설 수 없는 구역처럼 계층의 벽을 만들어가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장소라는 유토피아는 이룩할 수는 없겠지만 사람들이 계급사회에 귀속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다소 정의로운 사회는 만들기 위한 공동체의 노력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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