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특별, 당신에게는 차별
장애인 단체들이 장애인들의 이동할 권리나 비장애인들이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수 있기 위한 장애인 이동권 보장·장애인 권리 예산 반영을 요구하며 지하철 시위를 하면서 차별에 대한 이슈가 다시 부각되기 시작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언론이나 정치인들 그 누구도 본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를 위한 관점과 그걸 위해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입혀도 된다는 것이 인정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에 대한 말은 누구나 하면서도 그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종(race), 피부색(color), 종교(religion), 생물학적 성별(sex), 본적(national origin) 다섯 가지를 범주로 하는 차별에 대해 선거권, 동등한 공공 편의시설 이용권을 가진 차별금지법은 미국의 대통령인 린든 존슨이 서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는 차별을 하며 지속적인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에서 보듯이 같은 조상에서 형제관계로 시작을 하였더라도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한 신념이 다를 경우 그 어떤 것보다 극심한 갈등과 반목으로 유혈사태가 지속이 되고 있다.
보편적 차별금지법이 국회에서 계류된 지 오래되었다. 보편적 차별금지법을 이야기하면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이슈만 부각될 뿐 더 중요한 다른 것은 다루어지지 않는다. 보편적 차별금지법은 사실 대다수의 사람이 원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차별을 받기를 원하고 차별을 하기를 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은 다른 대우를 받기 위한 행동이며 그 자체가 삶의 방식일 수가 있다. 그런 사회에서 차별이 없어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무의미한 논쟁일지도 모른다.
장애인들이 요구하는 비장애인이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한국이 과연 나이, 성별, 종교, 학벌 등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회인가.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차별되기 위해 돈을 쓰면서 살아간다. 돈을 썼는데도 다른 사람과 차별받지 않는다면 무척이나 화가 날 것이다. 국가도 모든 것에서 차별을 한다. 배려라고 하지만 그 배려는 누군가에게 차별이 된다. 일부 계층에게 적용되는 기준이나 예를 들어 청년 주택이나 신혼부부들을 위한 배정이나 청년 적금은 다른 세대들에게는 과연 차별이 아닌가.
살면서 면접을 당해보기도 했고 면접을 하기도 했지만 차별은 어느 곳에 나 있었다. 차별이라는 기준은 정말 모호하다. 어떤 것이 차별인지 아닌지는 사회적 기준도 있지만 자신이 그렇게 느끼면 차별이다. 부모들이 아이 때부터 조기교육을 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좋은 학교나 좋은 직업 같은 허울은 결국 남들을 차별하기 위함이거나 차별당하지 않기 위함이다. 공교육이 의무화되었지만 인재를 기르고 기회를 준다는 명목아래 사립고등학교는 일반적인 서민들이 감당하기 힘든 교육비를 내고 운영되고 있다. 그들은 다른 일반 학생들과 구분되고 나아가서는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기 위해 그 비용을 충분히 감내하고 있다. 그만큼의 비용을 내면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 과정은 공정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어 보인다.
기득권들이 가장 싫어하는 법안 중 하나가 바로 보편적 차별 금지법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주요 대기업을 보면 어느 지위를 넘어서면 특정학교와 지역으로 채워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능력 따위는 상관없다. 어차피 그 정도 규모의 회사가 되면 어느 누구를 넣어놔도 시스템은 돌아간다. 어설픈 평등론자가 들어와서 차별의 성에 금이 가게 하기는 원하지 않는다.
당장 취업사이트나 각종 공모전이나 대외활동의 모집요건을 보면 나이, 성별, 지역 등에 제한을 둔 것을 볼 수 있다. 지역마다 지원하는 청년창업이나 거주요건은 나이 제한이 있다. 그건 차별이 아닌가. 나이는 과연 시간적인 것에 국한되어야 하는 게 합리적인가. 과거에 정해놓은 기준은 과연 지금도 유효한가. 전국적으로 돌아다녀보면서 만난 학교나 마을 입구 등에 걸려있는 플래카드의 문구들은 차별을 당연시하는 사회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사람이 가지는 생각은 시간에 따라 성숙해지거나 바람직해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기준에 맞춰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그 기준을 잣대로 삼기도 한다.
사회를 하나의 잣대와 성공으로 줄 세워놓는다면 모든 것은 차별로 설명될 수 있다. 인권을 이야기하고 약자의 편에 서 있다는 사람들조차 그들이 보는 차별의 시각은 딱 거기까지다. 자신이 아는 차별은 차별이지만 다른 곳에도 존재하는 차별은 느끼지 못한다. 필자는 이 사회가 과연 차별적 감수성이 있는가를 묻고 싶다. 몸소 겪어봐야 비로소 보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 차별을 말할 수 있을까.
특별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은 차별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명확하게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수많은 사건사고중에 차별의 관점으로 인해 발생한 강력사건도 적지가 않다. 자본주의 자체가 결국은 다른 사람과 차별대우를 받기 위해 살아가는 삶이다. 어떻게 밥을 먹고, 어떤 곳에 살며, 어떻게 이동을 하는 모든 것은 다른 사람과 다르게 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중에 하나라고도 볼 수가 있다. 차별적 시각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속에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누군가에 대한 차별은 결국 스스로를 차별받게 하고 그 차별은 스스로를 평가하고 재단하는 잣대로 작용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