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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Nov 07. 2023

흔들린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흔들릴망정 쓰러지지 않는다 (Fluctuat nec mergitur)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자각하는 것은 스스로를 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의 뇌는 진화의 결과로 깊숙한 곳에 자리한 뇌부위는 본능을 담당한다. 생존을 위해 동물과 같은 방식으로 진화했던 인간은 특별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자신이라는 존재를 망각하기도 한다. 서양철학의 큰 획을 그은 칸트는 제자들에게 결혼을 권유하면서 '여자란 미모보다 지참금이 중요하다'라고 충고하기도 했지만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신을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만들어가는 과정속에서 타인과의 비교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의 과정이라고 볼 수가 있다.      


생명체라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은 어떤 존재인가. 사람이라는 존재 역시 몸을 이루는 원소차원으로 분석해 보면 그다지 신비롭지는 않다. 그렇지만 사람의 몸을 이루는 것들이 만들어졌다가 흩어질 때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 몸에 정신이라는 것이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은 우주의 신비한 조화라고 말할 수 있다. 한자로 나는 我(아)로 표현한다. 나를 표시하며 첫 번째 사람이기도 하다. 즉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나서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나를 이야기할 때 사랑이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나란 존재가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냥 나 자체로서 존재의 의미를 가지며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다른 사람보다 더 대우를 받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비교우위 같은 것도 아니고 사회적우위나 성별우위 같은 것도 아니다. 나란 사람은 눈을 뜨고 있을 때도 눈을 감고 있을 때도 끊임없이 무언가에 휩쓸려가듯이 생각의 파도에 왔다 갔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그런 나를 찾지 못할 정도로 먼 곳으로 다른 힘의 파도가 밀고 가버리면 어떻게 될까.     


지금은 중국영화가 그런 인기를 누리고 있지는 못하지만 홍콩이 1997년 중국에 반환이 되기 전까지는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때 큰 인기를 누렸던 배우 중에 장국영이 있다. 2003년 사랑했던 자신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장국영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밀려가게 만들었던 언론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장국영이 출연했던 영화 중에 느와르 영화의 대표작이기도 한 영웅본색 같은 영화보다는 천녀유혼이나 종횡사해 같은 영화를 좋아했었다.     


나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을 채워 넣어도 존재의 의미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확인되지도 않는 온갖 유언비어에 시달리던 장국영은 파파라치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파파라치들은 스토킹 하듯이 사진을 찍고 일거수일투족을 알리는 것을 넘어서 온갖 거짓으로 장국영의 이미지를 추락시켰다. 외부에서 보이는 장국영과 스스로를 자각하는 장국영의 모습은 점차로 큰 괴리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직접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높은 산을 올라가서 라면을 끓여먹으면 라면이 제대로 익지 않는다. 라면이 익지 않는 이유는 높은 고도에서는 대기압이 적어져서 라면이 익을만한 온도가 되지 않았는데도 물이 끓기 때문이다. 사람이 우주복을 입지 않은채 대기압이 거의 없는 우주로 나가게 된다면 사람의 체온인 36.5도만으로 사람의 몸에 있는 수분은 순간적으로 끓듯이(물론 공기도 없고 온도도 얼어 죽을만큼 충분히 낮기에 생존할 수는 없다.) 기화가 되어버려서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어떤 관점으로 보면 사람은 자신이 견딜 수 있는 정신적인 압박의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한계를 넘어가면 끓어버려 기화하듯이 자신이라는 존재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실제 장국영은 자신의 삶에 마침표를 찍기 몇 년 전에 직접 작곡한 나(我)라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 첫 구절에 '난 영원히 이런 날 사랑할 테야'가 나온다. 장국영을 흔드는 수많은 언론과 기사 속에서 자신을 사랑하려고 노력했던 그의 모습이 교차된다. 공교롭게도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은 만우절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지 않았으며 확인되지 많은 이야기가 난무했었다.      


나라는 불꽃의 색은 하나로 규정되지는 않는다. 어떤 때는 빨간색으로 시간이 지나면 푸른색이 되기도 하고 희미해지는 짙은 갈색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 모든 것이 나가 될 수가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고정관념으로 그 색을 보고 판단하려고 한다. 그런 색은 나올 수가 없다면서 말이다. 어떤 색이 되든지 간에 그 색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다른 사람은 내가 될 수 없고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수가 없다. 세상에 나는 가장 처음이며 가장 사랑받을 수 있는 그런 존재다.     


인생은 작은 파도와 큰 파도의 연속이 반복적으로 오면서 살아가게 된다. 작은 파도가 쌓이고 쌓이면 사람이 쓰러질 수도 있지만 큰 파도 한 번에 쓰러질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파도를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인생은 빛을 잃어간다. 호된 역경을 겪으면 격을수록 인생은 갈고 닦여지면서 빛이 더해질 수가 있다. 원석일 때 아무런 빛을 내지 못했던 보석은 세공을 통해 빛을 내듯이 인생 또한 그러하다. 대단히 특별한 상황이 와야만 행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에서 비롯된 행복이 불안을 몰고 오지 않는다.     

 

파도를 이겨내라는 말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사람의 힘으로 이겨낼 수 없는 파도는 탈 줄도 알아야 한다. 때로는 정면돌파도 필요하지만 우회하는 것도 필요할 때도 있다. 그걸 억지로 하다 보면 고립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해류에 그냥 몸을 맡기면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흘러가버린다.      


지금까지 마셔본 술 중에 압생트가 인생의 쓴맛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초록빛 악마'라고도 불렸던 압생트는 수많은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술이다. 피카소, 헤밍웨이, 모네, 고흐 등이 이 술을 즐겨마셨다. 달콤한 발포성 와인인 샴페인이 빛의 술이라면 압생트는 어둠의 술이다. 빛과 어둠은 친한 친구의 관계이기도 하다. 언제나 그들은 같이 다닌다. 어느 한쪽만 좋아할 수도 없지만 그러려고 할수록 인생의 의미를 아는 것은 힘들어진다. 넘어져보지 않는다면 일어나는 방법을 익힐 기회도 없고 다음에는 더 그 방법을 알기가 힘들게 된다.      


사람들의 인생은 빛이 난다. 부유하던 가난하던 잘 나가던 못 나가든 간에 각자 다른 빛을 낸다. 돈을 잘 벌고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해서 더 밝은 빛이 나는 것은 아니다. 자신만의 빛을 만드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지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빛을 보고 따라가려고 한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색깔의 빛이 아닌데 불구하고 그걸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빛도 잃고 다른 사람의 빛을 내지도 못한다. 달달한 칵테일은 처음에는 마시기 좋지만 많이 마시면 질린다. 달면서도 쓰기도 하고 쓰기도 하면서도 미묘한 맛은 오랜시간 사랑을 받을 수가 있다.  

    

연두색이 특징인 녹색 요정(La Fée Verte)이라고 불리는 압생트는 불어‘Absithe’의 어휘가 붙은 술이다. 알코올 도수가 45~74° 에 이르는 증류주 또는 희석주로 색상은 밝은 연초록, 때로는 무색을 띄고 있다. 종류로는 압생트, 투넬 압생트(Tunel Absente) 일명 초록 악마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며 페르게르만스 압생트(Perekermann’s Absente)까지 있다. 압생트는 먹는 방법이 독특하다. 압생트, 물, 각설탕, 그리고 전용잔과 전용 스푼, 음수대(Fountain)가 필요한데 그냥 다이렉트로 먹어도 좋지만 잔에 압생트를 적당히 따른 후 압생트 전용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스푼을 올려놓는다. 그 스푼 위에 각설탕을 놓고 각설탕 위에 압생트를  한두 방울 먹기도 한다.      


압생트는 죽음을 의미하는 맛의 술이다. 오래저느이 압셍트는 분별력의 약화, 충동조절장애, 분노, 흥분, 불면증, 발작, 환각을 유발하기도 했지만 사람의 정신은 그렇게 유약하기도 하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범선의 키를 잡고 항해하는 사람이다. 범선에 자신만이 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같이 가는 수많은 사람들 이웃, 친구, 가족들이 당신 인생 조각의 한 부분씩을 가지고 있다. 부자나 빈자 모두 제각기 이유로 행복해지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살아간다. 더 가진 사람이 조금은 더 행복하다고 느낄 수는 있지만 덜 가진 사람보다 빛이 난다고 볼 수는 없다. 바다에 있는 배가 흔들리지 않으면 더 이상하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파도가 없는 항구에 정박하고 있으면 인생은 무채색으로 끝이 난다.     

 

'흔들릴망정 쓰러지지 않는다.'는 라틴어로 'Fluctuat nec mergitur'로 파리시의 모토이기도 하다. ‘파도가 배를 흔들어도 배는 가라앉지는 않는다‘라는 의미다. 사방이 온통 물이어도 마실 물은 한 방울도 없는 환경은 바람 하나 없고 밀려오는 파도 없는 망망대해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평생 흔들리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마주쳐야 하는 숙명이기도 하다.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도 가장 불행하게 만들어 줄 수 잇는 사람도 자신이다. 역경의 파도를 모두 이겨내고 헤쳐 나온 인생은 모두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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