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길위에 서 있는 우리들
자동차를 운전할 때 탁트인 직선도로를 가기도 하지만 수많은 커브길도 지나가게 된다. 커브길에서 운전하는 방법의 기본은 커브길에 진입하기 전까지 충분히 속도를 줄인 다음 통과할 때는 가속을 하는 것이다. 운전 하나만 할 때도 수많은 커브길에서 예측하지 못한 순간을 만날 때가 많다. 어떨 때는 정차되어 있는 차를 만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갑자기 튀어나오는 행인이나 심지어 동물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럴 때는 전방을 주시하면서 멈추기도 해야 한다. 한문철의 블랙박스 방송을 보더라도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사고가 일어나는 사례들을 적지 않게 볼 수가 있다. 그런데 길고 긴 인생의 커브길이라면 어떨까.
아쉽게도 대부분 인생의 커브길에서 악마를 먼저 만나게 될 때가 있다. 인생이 그렇게 설계가 된 것인지는 몰라도 대다수의 인생이 그러하다. 만약 천사를 먼저 만나왔다면 생각지도 못한 악마의 출현에 다시는 못 일어날 수도 있다. 인생의 커브길은 대부분 예측하기가 힘들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리고 항상 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자책하기도 한다. 판도라의 상자(Pandora's box)는 판도라가 열지 말라는 뚜껑을 열었더니 그 속에서 온갖 재앙과 재악이 뛰쳐나와 세상에 퍼지고, 상자 속에는 희망만이 남았다는 그리스 신화속의 상자이다. 판도라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모든 선물을 받은 여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증오, 질투, 잔인성, 분노, 굶주림, 가난, 고통, 질병, 노화 등만 보고 희망을 보지 않는다면 인간은 버틸 수가 없다. 보이지 않는 커브길이란 혹시나 생길 수 있는 위험에 멈추게 만들기도 한다. 다음 커브길까지 갈 용기가 없기 때문에 악마를 만난 순간 멈추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기억하는 삶의 진실이 된다.
2020년대 한국사회는 존 그래샴(Gresham's law)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다. 그레샴의 법칙이라고 불리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Bad money drives out good)"라는 법칙은 좋은 의도로 만들어진 시스템이라도 감시 등의 기능이 없으면 악화가 양화를 모두 대체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악인(惡人)이 양인(良人)을 구축(驅逐)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16세기의 영국의 재무관이었던 그래샴은 튜더 왕조 시절에 활동했는데 특히 엘리자베스 왕조라고도 불릴 만큼의 특별함을 가진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기축통화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였다. 여왕의 아버지였던 헨리 8세는 통화에 사용되는 동전의 40%를 은이 아닌 일반 금속으로 대체하여 제조했다. 순은으로 만들어진 화폐보다 통화량을 늘릴 수 있고 세수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질 좋은 은화는 시장에서 사라져버리고 질이 좋지 않은 은화만 유통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함량이 높은 질 좋은 은화는 집에 보관하고 질이 좋지 않은 은화만을 시장에 내놓았다. 사람들의 마음은 다 비슷하다. 좋은 것은 자신이 하고 좋지 않은 것은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들에게만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이 사회가 이래서 안돼라고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은 인생의 커브길에서 멈추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수록 우리의 현실은 긍정적인 방향보다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도록 놔두는 것이나 똑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만든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고 다음 커브길까지 갈 생각을 안 하면 어떤 영화의 제목처럼 '악마를 보았다'라는 말만 남기고 끝나게 될 수도 있다.
인터넷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생성된 여론은 국민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많아진 것 같다. 특히 익명성이 담보되는 SNS의 저변확대는 마약과 같은 향정신성 약물의 확산을 부추기고 있다. 댓글의 긍정적인 여론 형성 자체가 무력화될 만큼 악성 댓글이 넘쳐나고 무엇이 진실인지 더 알기 힘들어지고 있다. 최근에 계속 문제가 되고 있는 유튜브상의 거짓 정보의 노출 역시 인터넷의 역기능이 겉으로 불거진 일부 사례일 뿐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사례는 이것 말고도 많다.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떠나는 양심 있는 정치인이라던가 기업의 내부 비리를 고발했지만 현실은 바뀐 것이 없이 떠나게 되는 내부 고발자, 바른말은 했지만 떠날 수밖에 없는 언론인, 법조계의 문제를 지적하고 떠난 법조인 등 찾아보려면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개개인은 자신만의 커브길이 있고 그런 개인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고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짓게 된다. 집단이 커지게 되면 그것이 국가다. 국가가 가는 커브길은 개인이 가는 커브길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사람이라는 가치가 가장 소중하며 인간적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맥락은 동일하다. 이번 커브길에서 희망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멈춘다면 다음 커브길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천사를 만날 기회도 없다.
한국전쟁이 휴전상태에 이르고 1980년대까지 대학 학위가 없어도 괜찮은 일자리를 구하고 가족을 부양하고 나름 괜찮은 중산층의 사는 일은 가능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이제는 훨씬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으며 고졸보다 대졸자가 훨씬 많은데도 불구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줄어들었으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는 더욱더 커져가고 있다. 매년 그 차이를 갱신해가면서 소득의 불균형은 심화되고 있다. 한국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신화답게 직선길을 지나 거대한 커브길에 들어서있다. 커브길을 통과하지 못하면 다시 직선길에 들어설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태어난 이상 삶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어떻게든 나아가야 하는 것도 현실이다. 이번 커브길에서 없었다면 다음 커브길로 가야 한다. 다음 커브길에서 없다면 그다음 커브길로 가는 것이다. 다음 커브길까지 열심히 전진해서 돌아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질지 모른다. 다음 커브길까지 않고 멈추고 이 길에서 살아갈 수는 있다. 선수들이 계주를 뛰게 되면 커브길이 끝나는 지역에서 배턴을 다음 선수에게 넘겨주면서 달린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은 사회를 뛰게 될 다음주자를 만드는 것이다. 자신을 대신에서 다음 구간을 뛰게 될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은 작금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50년 후 한국이 어떤 모습이 될지는 단언할 수는 없다. 인구통계에서처럼 한국이 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 다시는 새로운 풍경을 만나지는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인생의 커브길에서 좌절뿐이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거기서 멈추었기 때문이다. 잘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 일치도 제대로 되지 않으며 개개인으로서 각자의 기호와 욕망은 다르다. 모든 기준은 인간의 좋은 삶이나 최선의 인생 방식에 대해 중립적이지가 않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커브길 위에 서 있다는 생각을 한다. 커브길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그런 시간의 굴레에 갇혀 있지만 예측되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지만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