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에필로그

순간을 위해 희생하는 오늘 역시 자신의 인생이다.

불행과 불안은 어떤 점에서 다를까. 행복과 행운은 어떤 점에서 다를까. 그 척도는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기분의 상태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행복은 너무나 상대적이고 기분에 대한 통제도 쉽지가 않다. 개인적인 자유와 행복은 분명히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경험이 부여한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면서 자신을 결정하지 못하고 경험에 의해서 결정이 되어버리면 행복은 요원한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수많은 고민들이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알프레드 아들러는 “인간은 누구나 지금 이 순간부터 행복해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사람의 거대한 스토리가 담긴 인생은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연속적인 선(線)의 연장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면 계속 과거의 자신에게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사람들은 어딘가에는 정말 행복해지는 정상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돈이나 자리에 연연해가면서 목표를 세운다. 특정금액을 모으기 위해 지금의 모든 것을 포기하다시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과연 행복으로 가는길일까. 그렇다면 정상까지 가는 여정은 그냥 그런저런 인생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무한한 자기 긍정이지만 자기수용은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를 파악하고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고 바꿀 수 있는 것에만 노력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인정욕구는 자신의 눈이 아닌 타인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노력이다. 우리는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그 타인이 부모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학교, 직장, 결혼, 출산등의 모든 삶의 과제는 본인이 결정할 것이다. 개개인의 삶은 주변 사람이나 사회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개개인의 삶에 개입하려할 것이다. 그래야 마케팅도 쉽고 상품도 팔기 쉬워지며 정치도 수월해지고 사회가 정한 룰에 얽매여 살기 때문이다.

행복은 이루고 싶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가능과 불가능으로 구분되는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다. 같은 국가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모두가 다르다. ‘나’라는 존재는 있지만 뇌는 그 존재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바라본다고 하지만 철저하게 주관적이다. 주관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객관적으로 비교하면서 살아가다보면 그 과정에서 괴리가 발생한다. 그 괴리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 행복해지는 것은 요원해질 수 밖에 없다.


물질을 이루는 분자들이 취할 수 있는 최저온도인 절대영도를 기준점으로 하는 절대온도에서는 모든 분자 운동이 중단된다. 그렇지만 그런 온도에서는 어떤 생명체도 살 수가 없듯이 삶의 절대적인 기준도 없다. 같은 온도라고 할지라도 계절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같은 온도인데도 불구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느껴지는 반면 겨울에는 춥다고 느껴진다. 사람마다 삶의 온도는 모두 다르다. 같은 조건이라고 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행복을 느끼면서 살고 어떤 사람은 불행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입장차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유전적으로 받은 기질과 영유아기때 부모에게 받은 기질로 만들어진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이미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그때까지 없었을 뿐이다. 행복은 사람의 기질이나 환경, 능력에 구애받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자신을 긍정적인 모습으로 바꾸고 싶다는 용기와 조금은 나아질 수 있다는 용기가 있다면 내일이라도 변화될 수가 있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도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도 그 감정을 느끼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뿐이다. 미래에 올지도 모르는 그 순간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을 위해 희생하는 오늘 역시 자신의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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