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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Dec 22. 2023

생모(生母) 살해

1989년 최악의 방법으로 존속살해한 살인자 김영호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 소박한 바람처럼 생각되지만 그 바람을 현실화하는 사람들의 수는 많지가 않다. 우선 행복한 가정에서 출발할 지부터가 불확실하다. 태어나보니 이미 행복과 거리가 먼 가정일 수도 있고 자신에게 물려준 유전자의 대부분이 쓸모가 없을 수도 있다. 시작이 잘못되었을 경우 자신이 원하는 삶으로 가는 과정은 험난할 수밖에 없다. 


행복하지 못하게 시작한 한 가정이 있었다. 그 집으로 시집을 간 여성도 무척이나 불행한 삶을 살았다. 남편은 외도를 일삼았으며 시어머니조차 혹독하게 자신을 대하였다. 그렇게 삶을 이어가던 중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여성 이 씨는 5살, 3살 아들을 고아원에 맡기고 그 집에서 뛰쳐나온다. 이 씨는 그 이후에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남자와 결혼해서 나름의 행복을 찾아가면서 살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고아원에서 크기 시작한 아이의 이름은 김영호였다. 동생과 같이 살던 김영호는 19살이 되어 고아원에서 나와서 서울, 부산, 목포 등지를 떠돌면서 품팔이, 막노동 등의 일을 닥치는 대로 했지만 삶의 형편은 전혀 나아지지가 않았다. 세상에 불만을 잔뜩 품고 있던 김영호는 절도와 폭력으로 여러 번 감방을 드나들게 된다. 그에게 붙은 별이 다섯 개가 되어 대장(전과 5번)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속에서 뿜어져 올라오는 분노를 삭일 수 없었던 김영호는 자신의 어머니를 찾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은 자신을 버린 어머니로 인해 벌어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이 씨를 찾아낸다. 세상에 대한 원망과 노력해도 세상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았다.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은 모두 엄마의 탓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찾아가서 온갖 행패를 하면서 돈을 달라고 한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하는 욕설을 했다고 한다. 지 편하게 살자고 아이를 버렸으니 돈을 내놓으라고 한다. 날 이런 꼴로 만들었으면 돈이라도 내놔야지. 노친네와 재혼한 이유가 돈 때문 아니었냐는 말을 계속 반복한다. 계속 돈을 조금씩 강취하다가 결국 의부가 토지를 판돈 2,100만 원(당시 지방의 20평대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는 돈)까지 빼앗다시피 한다. 


김영호의 엄마 이 씨는 자신이 자식을 버렸다는 죄책감 때문에 온갖 패륜적인 행동과 욕설을 참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빼앗은 돈은 김영호가 유흥비와 되지도 않는 사업으로 모두 탕진해 버린다. 그리고 다시 찾아가게 되는데 그때는 의부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풍으로 인해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던 의부를 때려 죽었지만 나이가 70대 후반이어서 엄마 이 씨는 눈을 감은채 그냥 장례를 치러서 그 당시는 경찰에서는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버려졌다고 생각했던 김영호는 당시 결혼을 했었다. 아내 강 씨를 시도 때도 없이 때리고 돈 같은 것은 가져다주지 않았다. 엄청난 학대를 다시 자신의 가족에게 한 것이다. 아내 정 씨는 결국 집에서 도망 나간다. 아내가 도망을 가자 1살의 아들과 3살의 딸을 동대문과 청량리에 가져다가 버린다. 김영호는 폭주를 시작하다가 돈이 떨어진 어느 날 1989년 11월 25일 다시 자신의 엄마 이 씨를 찾아간다. 


서슬 퍼런 칼과 광기를 보여주면서 자신의 엄마에게 자결할 것을 강요한다. 엄마 이 씨는 결국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는지 복부를 자신의 손으로 3, 4차례 찔렀지만 치명상은 아니었었다. 그렇게 쓰러진 엄마의 손등을 묶고 얼굴에 천을 씌운 채 마당으로 끌고 나간다. 마당에 나무와 콩대를 쌓고 시너를 쏟아붓고 불을 붙인다. 아직 살아 있는 엄마 이 씨는 그렇게 장작 위에서 비명을 지르다가 불태워져서 죽게 된다. 그전에 김영호는 자신의 엄마 이 씨를 성폭행한 것이 사후 부검에서 나왔다고 한다. 


불을 지른 김영호는 그 길로 도망쳐서 서울의 이곳저곳에 숨어서 도피한다. 이미 마을 사람들은 범인이 김영호임을 모두 말해주었다. 김영호는 봉천동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사건이 벌어진 지 3일 뒤인 28일 새벽에 붙잡혔다. 80년대에 벌어진 언급하기도 힘들었던 그 범죄는 언론에서 제한적으로 노출이 되었다. 불안심리가 더욱더 부각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정부는 그 사실을 함구하기를 원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패륜범죄를 저지른 김영호는 사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절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살다가 1992년 12월 29일 당시 당대의 악명 높은 범죄자들과 같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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