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살았던 옥천 문바위 마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조선의 군대는 침략에 대비하여 많은 예산을 들여 정규군을 구성한다. 그렇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자 다시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200여 년이 지나자 조선의 군대가 가지고 있던 무기는 서양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으로 전략했고 군대 또한 지역방위 수준으로 떨어졌다. 치열한 제국주의 시대를 거친 서양은 전 세계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조선 역시 그 파도에서 비켜나갈 수가 없었다. 불교는 탄압받고 종교의 역할을 했던 유교는 성리학적인 명분주의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사이를 천주교가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길게 봐야 100년의 변화를 가지고 사람들은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한다. 19세기 중반 이후에 혼란한 조선사회에 종교는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서학이라고 불리던 천주교를 대신하는 한편 새로운 이상세계를 꿈꾸었던 사람이 최제우다. 몰락양반의 후손으로 서자였던 최제우는 매관매직이 일상화되었던 조정에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옥천에 동학의 제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이 머물렀던 때가 있었다. 1894년 동학혁명 당시 이곳 옥천 청산 한곡리 문바위 마을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1860년에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급속하게 늘어나는 동학교도를 관리하기 위해 동학교도들을 통솔할 '접주'(接主)들을 임명했는데 그 지역을 '접소'(接所)라고 명했다. 그렇지만 조선 조정은 동학을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해 최제우를 백성들을 현혹한 죄로 처형했다. 그렇게 했지만 동학 세력은 더 확산이 되며 제2대 교주로 최시형을 내세운다.
문바위는 옥천의 안쪽에 자리한 거대한 바위다. 이곳에 가보면 분위기가 남다른 것을 볼 수가 있다. 이곳에 머물기도 했던 최시형은 동학을 정당한 종교활동으로 인정해 달라고 했지만 조성 조선은 매우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며 시간만 끌었다.
한곡리 문바위에는 박희근, 김정섭, 박맹호, 김영규, 김재섭, 박창근, 신필우 7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군들이 이곳에 이름을 새긴 것으로 보고 있다.
동학은 극단적으로 조선조정을 타도해야 한다는 사람들과 최시형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교세확장을 통해 힘을 키워서 자신들의 뜻을 관찰시키고자 하는 사람들로 나뉘게 된다. 그러던 중 1894년 전라남도 고부에서 가혹한 수탈에 반하여 일어난 농민항쟁은 동학교문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94년 9월 18일 이 부근에서 농민항쟁을 보며 일본군의 침략과 조선 조정의 부패한 세력에 대항하여 전국 동학도에게 총동원령을 내리면서 동학전쟁을 계획하였다.
그 시대적 상황은 역사적인 기록에 의해 상상해 볼 수가 있다. 그때 이곳에 수만의 사람들이 집결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동학군의 훈련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 바위가 많은 곳에는 옥황상제의 셋째 딸 계화공주에 대한 이야기가 스며든 장수바위 발자국도 있다.
문바위의 위쪽으로 올라오면 동학운동을 기념하는 기념탑이 나온다. 최시형이 이끌었던 동학농민은 청과 일본의 지원을 받은 정부군에 대패했으며 공주 우금티에서 일본군에게 몰살당하게 된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어떤 길이 옳은 것인지 흔들릴 때가 있다. 최시형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우주만물에도 하늘이 깃들어 있다는 '물물천(物物天) 사사천(事事天)'의 범천론적(凡天論的) 사상까지 주장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것을 많은 사람이 믿어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며 안도해한다. 그만큼 자신의 생각을 바로 세우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