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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庇仁)에 온 일본인

명문이 낙항하여 자리를 잡았다는 서천군의 비인면

이순신 시리즈의 마지막이기도 한 노량에서 이순신을 상대하는 왜군의 장수로 백윤식이 열연했던 시마즈 요시히로가 등장한다. 그는 에도 시대 사쓰마번 초대 번주 시마드 이에히사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사쓰마번은 일본이 봉건시대를 벗어나 근대일본으로 나아가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즉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였으며 일본 제국 해군의 주축을 이루게 된다. 그 사쓰마번의 중급 무사였던 야스다 요시카타(安田義方)가 탄 배가 표류하다가 도착한 곳이 바로 지금 비인(현 서천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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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서 살펴보면 비인읍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비인면은 크지 않은 곳이지만 역사 속에서 여러 번 등장을 한다. 1419년에 왜구의 습격을 받은 곳이 바로 비인이라는 지역으로 이 때문에 조선은 대마도(쓰시마) 정벌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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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군 비인면이라는 지역은 백제때 비상현(比象縣), 신라시대 비인, 고려시대 가림현(嘉林縣: 지금의 林川)이었다가 조선시대에 현감을 둔적도 있었다. 1419년(세종 1) 5월 50여 척의 왜선이 비인현 도두음곶(都豆音串)을 침공하여 비인성을 포위하였는데, 조정에서 대규모의 병력을 출동하여 왜구를 격퇴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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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농촌마을의 전경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서천 비인이다. 조선과 일본은 우호적인 관계를 200년 넘게 지속하고 있었기에 조선관리들은 도착한 일본인들을 잡아가두지는 않았었다. 야스다 요시카타(安田義方)가 이곳에 온 것은 1819년으로 이때의 충청도는 공청도(公淸道)라고 불렸으며 서천군은 비인(庇仁)이라고 불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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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땅에 온 일본인은 비인에서 지냈던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기게 된다. 일본으로 돌아가기까지 6개월 동안 조선에서 있었던 일과 대화(필담)를 기록한 ‘조선표류일기’를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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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에도 8 경이 있는데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월명산이 있다. 이곳에서 보는 해돋이가 서해에서 보이는 장관이라고 한다. 비인향교와 비인 5층석탑도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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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타 요시카타가 이곳에 왔을 때 비인현감은 윤영규였다고 한다. 교분을 쌓았던 조선인들은 이들의 귀환에 앞서 명주와 베, 지필묵, 청심환 등 선물과 식량을 여러 차례 보내주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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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이라는 지역에도 전통시장이 있는데 지금은 5일장으로만 열리고 있다. 주변에는 여러 상점이 있는데 매일 오픈하고 있지는 않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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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면 행정복지센터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이곳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의 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석 군을 지나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비인향교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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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8년(태조 7)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된 비인향교의 건축형태는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앞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뒤쪽에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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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군이라는 지역은 1419년 왜구의 습격이 있었으며 1816년에는 영국 배가 정박하여 성경을 전래하여 성경전래지도 남아 있다. 그로부터 3년 후에 일본인은 이곳에 와서 조선의 모습을 담은 기록을 남겼다. 그로부터 50여 년 뒤에 사쓰마번 주도로 일본은 획기적인 변화를 만든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게 된다. 명문이 낙향하여 자리를 잡은 비인면의 여러 성씨가 자리를 잡았는데 대표적으로 밀양박씨(密陽朴氏), 평산신씨(平山申氏), 강릉유씨(江陵劉氏)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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