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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18. 2024

연가시

현대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는 영화 

단세포생물에서 다세포생물로 진화하고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처럼 다양한 형태로 동물이 진화하면서 기생동물도 같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기생이라는 것은 다른 생존방식 중 하나다. 자신의 능력이 아닌 다른 생명체의 생존능력에 기생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 쓸데없는 존재들이다. 몸에 기생하지 않아도 자신이 하고 싶지 않아서 혹은 무능력해서 다른 가족이나 이성에 기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주변에서 볼 수가 있다. 그런 존재들은 과연 생존할 가치가 있을까. 누군가의 꿈을 짓밟고 혹은 발목을 부여잡고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을 어떤 관점에서 봐야 할까. 


실제로 탐어나 곤충채집을 나가보면 이들과 함께 채집되기도 하는 연가시는 1 급수 지표종이다. 그렇게 더러운 환경에서 살지 못하지만 기생하는 곤충들에 기생하여 수백만 개에서 최대 2천만 개의 알을 낳는다. 육식 곤충을 조종해서 물에 빠지게 하여 연가시가 나오게 된다. 이 연가시가 인간에게 기생하게 되어 전국적인 대혼란이 일어나는 장면을 그린 영화가 연가시다. 인간의 속에서 소화되어 단백질공급원이 될망정 원래 연가시는 인간에게 기생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런 연가시가 살아남을 수 있고 곤충의 속에서 영양분을 흡수하면서 자라난다는 설정은 위협이 될만하다. 


영화 속에서 설정은 한 제약회사와 관련된 사람들의 음모에서 시작된다. 인간에게 기생하여 물을 통해 전염될 수 있는 변종 연가시를 만들어서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고 자신들이 만든 기생충 약을 팔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한국의 제약회사가 그런 연구를 통해 기생충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정도의 연구를 하는 제약회사는 아직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코로나19도 치명률은 그렇게 높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끼친 영향력은 상당했다. 연가시 같은 기생충이 사람의 속에서 기생하고 그러다가 뇌를 조종하여 물에 빠져들어 결국 가사상태에 놓여 죽게 만든다는 설정은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이게 할 만했다. 

사람의 뇌는 때론 유약하고 의지가 부족하다. 우연하게 피운 담배하나도 끊기 힘들어서 매년 시도하고 어쩌다가 맛본 마약에 자신을 막다른 길로 몰아넣으며 자신에게 행운을 줄 것이라는 도박도 모두 뇌가 잘못판단한 결과이기도 하다. 사람의 뇌는 스스로를 속이며 자신에게 유해한 것조차 유용한 것이라고 믿게 만든다. 연가시라는 기생충 역시 그런 뇌의 가장 취약한 측면을 노린다. 

우리의 의료시스템은 정상적일 때 유지가 될 수가 있다. 만약 연가시와 같은 사태가 발생한다면 한 번에 무너질 것이다. 사람은 살아 있을 때 존재의 이유가 있지만 죽는 순간 물건(thing)이 된다. 사람은 죽으면 아무런 무가치한 존재처럼 취급된다. 아무리 생명의 가치를 부르짖어도 사회적 위치에 따라 다르게 취급이 된다. 한국사회가 동일한 의료복지를 받고 있으냐고 묻느냐면 기초단계에서만 그렇다. 중증질환을 넘어가게 되면 받는 의료복지는 가진 것과 사회적 위치에 따라 극단으로 갈리게 된다. 그건 그 상황이 되어봐야 알 수가 있다. 제발 그런 상황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우연에 기대어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생충이라는 영화를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룬 것 같은 이선균도 인간사회의 무차별적인 광기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들이 진급을 하기 위해서 마약쟁이 여자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언론에 흘리고 탈출구가 없는 곳으로 몰아간다면 그 상황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이 사회에는 생각보다 연가시 같은 기생충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자신들이 기생충 같은 존재라는 것도 모르고 살아간다. 그냥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의 고혈이라도 빨아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꿈틀거리는 연가시처럼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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