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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Feb 04. 2024

라스트 사무라이

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과 시대 변혁을 이룬 일본의 이야기  

지금도 정치인들이나 지방공무원들은 해외연수를 수없이 나간다. 그들이 해외로 나가서 무엇을 배워오는지 당최알 수가 없는 여정을 소화한다. 그리고 한국은 여전히 좋은 시스템은 적용되지 못한 채 서서히 고인 물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세상이 변화하고 있고 배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한국은 그 방향성보다 제대로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 조선의 가장 큰 패착은 1800년대 후반에 이루어졌다. 1853년, 1871년 두 시기 사이에는 18년이라는 시간의 갭이 존재한다. 


검은 군함이 지금의 도쿄인 에도만에 등장한 것이 1853년이고 강화도에 등장한 것이 1871년이었다. 일본의 막부도 당황했고 조선의 조정도 당황했다. 수군이 발달하지 않았던 두 국가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가 않았다. 지속적 평화와 방만한 국가 경영의 시기 동안 조선은 안동김 씨, 풍양조 씨 등과 같은 세도가문과 일본은 번과 사족으로 이루어진 집단들은 국가를 좀먹고 있었다. 그러나 양국의 대처는 전혀 달랐다. 16세기부터 유럽이 대항해시대를 하면서 은의 유통량은 급격하게 늘어날 때 일본의 사쓰마번등은 조선에서 가져온 은 제련기술을 토대로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한편 조선은 은이 과도한 사치를 조장한다면서 오히려 은광을 폐쇄하기도 한다. 무역에서 중요한 통화수단을 조선은 도외시한 것이다. 

톰 크루즈가 주연을 맡은 라스트 사무라이라는 영화는 일본 봉건시대의 막을 내리는 세이난 전쟁을 기반으로 그려진 영화다. 세이난 전쟁은 일본을 성공적인 근대화로 이끈 메이지 유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전쟁이다. 앞서 일본해군의 모체와 현 일본국기를 최초로 만들어서 건 사쓰마번의 사무라이들의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할까.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협조로 이루어진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사무라이등은 신 정부에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조슈번의 요시다 쇼인은 제국을 지향했던 일본의 지도자들과 지금의 일본의 총리등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된 사람이다. 


세이난 전쟁(西南戦争)은 메이지 유신에서 9년 후인 1877년에 일본 제국에서 발생한 내전으로 일본 역사상 본토에서 일어난 최후의 내전이다. 과거에서 머무르려고 했던 일본인들과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일본인들과의 충돌 뒤로 일본은 본격적으로 한반도와 중국, 동남아로 나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 그 발판은 이와쿠라 사절단이 역사학에서 분류한 시기는 메이지(明治) 원년인 1868년으로 간주하는 3년 뒤인 1871년에 출발하면서부터 동력을 받게 된다. 이때 조선이 한 일은 대원군이 전국에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서원철폐령을 내린 것이다. 지금 자율형 사립고나 외고와 같은 느낌의 서원 적폐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해에 미국 군함이 강화도에 도착하여 신미양요가 발발했을 때 쇄국으로 나간 것은 일본과 전혀 다른 행보였다. 

서구 열강의 신 문물에 매료된 일본 제국의 젊은 황제가 신식 군대 조련을 위해 알그렌을 초빙하면서 서양과 동양의 만남이 시작이 된다. 서구화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황제의 측근들은 사무라이 집단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알그렌은 자신이 뜻밖에도 사무라이에 대해 연민과 동질의식을 느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들의 전쟁이 시작되기 6년 전쯤 메이지 신정부 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주요 핵심 각료들이 해외사절단으로 이와쿠라 토모미를 비롯하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로 당시 정권의 장관들, 행정가와 학자 48명, 60명의 유학생들이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한다. 


1년 10여 개월 동안 워싱턴 D.C. 를 거쳐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러시아, 프로이센, 덴마크, 스웨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 이집트, 아덴, 실론, 싱가포르, 사이공, 홍콩, 상하이를 방문하는 여정 속에 이들은 일본이 소국이 아닌 대국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엿본다. 특히 전체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할 철도와 우편시스템을 일본에 본격적으로 도입을 하기로 결정한다. 이런 시스템은 한반도를 점령할 때 그대로 적용하였다. 덕분에(?) 한반도 전역에 철도가 부설되고 대전과 같은 도시가 만들어지게 된다. 

근대화시기에 십수 년의 차이였지만 일본과 조선은 닮은 것이 많았다. 일본경제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조선경제도 심각한 타격을 입으면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 갔다. 화폐가치가 형편없이 떨어지던 시기에 재정을 마련하고자  좌의정 김병학(金炳學)의 건의로 1866년(고종 3년) 11월부터 1867년(고종 4년) 6월까지 약 1,600만 개가 주조되었던 동전인 당백전(當百錢)이 발행되었다. 주화에 새겨진 글자는 '호대당백(戶大當百)'으로, 풀이하면 "이 화폐는 호조(戶曹)에서 주조한 고액화폐이며, 일반 동전의 100배에 해당한다."는 의미다. 게다가 그나마 가치가 있다는 실제 구리의 함량은 당대 상평통보의 6-8배에 불과하여 가치가 형편이 없었다. 일본 역시  일본의 금값이 국제 시세보다 싸다는 것을 알아차린 외국 무역상들이 일본의 금화를 대량으로 유출하였는데, 이에 막부 정부는 금화에 불순물을 섞어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라스트 사무라이를 보면 멋지게 그리고 폼나게 신념에 의해 살고 싶은 남자들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생계는 생각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마지막 발악처럼 보였다. 조선과 일본의 사례에서 보듯이 조선의 패착은 일어설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입혔다. 정치, 경제, 사회, 사상에서 모두 실패한 조선은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경제가 기반이 되어야 하지만 당백전을 물품구입의 수단으로만 썼을 뿐 조세수납에서는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한 짓거리는 조세수입은 거두돼 나쁜 건 모두 백성의 몫으로 남겨두게 하였으며 1883년에는 악화 당오전을 남발하면서 화폐를 기반으로 한 조선경제는 그냥 일어설 수 없게 만들었다. 

도사번의 하급무사 출신에 불과한 사카모토 료마의 행보는 참으로 신기한 측면이 있다. 도사번 소속에서 나와 낭인이 되어버린 사카모토 료마는 그냥 끈 떨어진 길거리 무사에 불과했지만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회합을 이끌어냈으며 결과적으로 메이지유신의 발판을 만들었다. 분명한 것은 정신적인 유학(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과 서양문물과 결합을 통해 사상적인 기반을 마련한 것이 매우 유효했다는 것이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해외로 나가기 전 일본 메이지정부는 폐번치현을 본격적으로 시행하면서 번의 시대를 마무리하게 된다. 


설자리가 점점 줄어들던 사무라이들은 그 탈출구로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을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메이지정부등은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뭐 멀지 않은 시기에 일제에게 강점을 당하기는 하지만 좀 빨랐다고 생각했던 메이지 정부는 이를 반려하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를 명분으로 사쓰마 번 출신 무사들을 이끌고 구마코토 성을 공격한다. 노량에서도 등장했던 일본 무장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에서 얻은 경험 등을 토대로 난공불락의 요새 구마모토성을 설계하였는데 결국 함락하지 못했다. 이 전쟁을 토대로 그려진 영화가 라스트 사무라이다. 이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으며 메이지 유신을 이끈 세명중 한 명인 오쿠보는 세이난 전쟁 이후에 사무라이들에게 암살당했고 그가 있었던 중요직책인 내무경 직책에 이토 히로부미가 오르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도 포함되어 있던 이와쿠라 사절단에 포함된 사람들은 일본 정재계에 큰 축을 형성하는 지도자들로 성장하며 지금까지 아베나 주요 인사들은 그들의 후손이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출발한 해인 1871년은 유신정권 박정희의 아버지인 박성빈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며 프랑스를 대표하는 위대한 소설이라고 불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집필한 마르셀 푸르슈트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보면 정말 글의 표현이 참 독특하고 길다. 일반적으로 '노을이 진다'라는 표현은 소설 속에서 '지금 이토록 슬픈 빛으로 빛나는, 마치 보닝턴이 그린 아드리아 해처럼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차차 어둠이 태양을 쫓아가는 형국의 하늘은 그 그윽한 풍광 속에서 아스라이 사라져 갔다.'로 표현된다. 


주제가 다른 쪽으로 흘러가기는 했지만 지금도 일본에서는 세이난 전쟁을 일명 젔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봉건의 일본을 막을 내린 마지막 전쟁이기도 하다. 세이난 전쟁에서 처음 군대식 빵인 병랑빵이 만들어지는데 아마도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는 그런 빵을 좋아하는 지인 입맛에 딱 맞지 않을까 싶다. 그 빵은 단팥빵을 최초로 만든 기무라야에서 만들어졌으며 일본에서 일제강점기 때 한국으로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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