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라는 배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는 용두사지 철당간
수렵하고 채집하고 평균수명이 30세를 넘지 않았던 오랜 시기를 지나 문명사회에 진입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국가를 운영하는 경제의 기반이 되는 돈이었다. 고대국가의 모든 흥망성쇠에는 국력이 있지만 국력을 뒷받침하는 것은 바로 돈이다. 영어로 조폐국을 의미하는 ‘Mint’는 기원전 269년 유노 모네타 신전 인근에서 생산된 로마의 은화에서 기원하였으며 로마의 역사 대부분 동안에 고대 로마의 화폐는 금, 은, 청동, 오리칼쿰, 구리 주화로 만들어졌는데 구리는 중요한 화폐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지금이야 포스코나 현대제철과 같은 대형 제철회사가 있지만 과거에 철이나 구리등과 같은 금속을 제련하는 기술은 국가 기밀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이날의 여정은 청주에 자리한 용두사지 철당간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청룡의 해에 용의 이름이 사용된 용두사를 찾아가는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청주 중앙공원에 들어서자 충청북도 청주시 남문로 2가 중앙공원에 자리한 충청북도 기념물 제23호인 청주시 척화비가 보인다. 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이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와 1871년(고종 8) 신미양요의 외침을 격퇴한 뒤 전승을 기념하고 일반 백성들에게 서양 배척의 의지를 보다 확고히 천명하기 위해 1871년 4월 서울을 비롯해 전국의 요충지에 세운 것이 지금 남아 있는 것이다.
청주라는 도시는 배를 닮은 형국의 지형에 자리하고 있다. 위아래로 보아도 청주는 목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지금은 중심가이지만 청주시 중심의 육거리시장과 그 부근은 무심천이 흐르고 있는데 오래전 고려시대에는 지대가 낮아서 물에 잠기는 경우가 많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우선 청주시 용도사지 철당간의 옛날 사진을 보기 위해 문화도시 청주 청년문화상점 굿쥬를 찾아가 본다. 이름 역시 철당간점으로 안쪽에는 청주시의 옛 역사를 살펴볼 수가 있다.
청주는 예로부터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고려가 건국될 때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곳이며 고려말 조선초에도 큰 비중을 차지했던 곳이다. 운등사의 주지스님 혜원이 청주의 북쪽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엄청나게 많은 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제 부처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혜원은 용두사로 가서 배가 풍랑에 떠내려가지 않게 돛대를 세워라."
옛 사진에서 기록된 용두사지 철당간의 모습이다. 건립 시기가 명확히 알려져 있는 귀중한 철당간인 용두사지 철당간의 기문에서 ‘유준풍삼년태세임술삼월이십구일주성(維峻豊三年太歲壬戌三月二十九日鑄成)’이라고 하였는데, 준풍은 고려 광종 11년부터 사용한 연호이므로, 이 철당간이 962년(광종 13)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옛 청주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사진들이 있다. 사진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아마 1,000년쯤 지나 터미네이터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사진들은 기록으로서 명확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청두사지 철당간과 관련된 전설 속에 초립동이 소금배가 이곳에 닻을 내려야 하는데 돛대가 없어서 걱정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청주라는 도시는 끊임없이 물자가 오가는 도시로 당시 호족이었던 김예종(金芮宗)이 사촌형 희일(希一) 등과 함께 철당간을 주조하여 사찰을 꾸며달라고 부탁을 한다.
청수에 오래 살았던 사람들은 청주시의 성안 쪽에 용두사지 철당간을 중심으로 성안길을 그냥 시내라고 불렀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청주를 대표하는 극장은 현대극장과 청주극장이었다.
성안길은 청주에 사는 사람이라면 나와서 놀던 곳이고 청주의 역사가 새겨진 곳이었다.
재정을 마련하고자 좌의정 김병학(金炳學)의 건의로 1866년(고종 3년) 11월부터 1867년(고종 4년) 6월까지 약 1,600만 개가 주조되었던 동전인 당백전(當百錢)이 발행되었을 때 그 돈의 재료로 바로 철당간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 뒤 1907년 재건됐고, 1927년과 1957년에 이어 1972년 현재 모습으로 복원됐다.
청주라는 도시의 지형에 균형을 잡아주었던 용두사지 철당간이 당백전이라는 돈이 되었다. 배의 돛대 구실을 하는 당간을 세워 재난을 피했다고 해서 청주를 주성(舟城)이라고 했다는 일화는 아직도 남아 있다.
굿쥬 철당간점에서 옆으로 나와서 가면 철당간이 보인다. 오래된 사진 속에서는 기울어져 있는 모습도 볼 수가 있었다. 당간은 원통 모양의 철통(鐵筒) 20개를 위아래로 물려 이어지게 만들었다. 아래로부터 세 번째 철통에는 393여 자의 글자가 주조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새겨져 있다.
앞뒤쪽면의 테두리에는 가늘게 오목새김된 선이 있는데, 바깥쪽면의 돋을새김 된 선과 어울리면서 바깥쪽면의 가운데 부분에는 굵게 돋을새김 된 선이 세로로 새겨져 있다. 맨 아랫부분에는 널찍한 받침돌과 간대(竿臺)가 놓여 있다.
매일매일 보던 그 철당간은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곳에 있으면서 청주라는 도시의 중심을 잡아주고 때론 돈으로 바뀌면서 경복궁을 재건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원래 만들어졌을 때의 높이보다는 낮아졌지만 청주라는 배가 항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 철당간의 의미는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지속이 되며 방향을 가르쳐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