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직업선택의 자유가 있을까?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공정하지 않은 사회에 살면서 공정하다는 단어는 정말 많이 사용한다. 태어나면서 어떤 것은 공정과 아주 거리가 먼 곳에 위치해 있다. 그걸 알 때쯤이면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마이클 샌델의 책 공정하다는 착각에서처럼 능력주의는 모든 이들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태어난 것 자체가 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태어나면서 원죄의 무게를 짊어지듯이 가고 싶은 길을 걸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 의사 증원문제로 사회가 떠들썩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부분에서는 공정하지 못한 과정을 거쳐서 올라왔고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단체행동을 하고 있다는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만약 어떤 특정분야에서 일하기 위해 자격증이 필요하고 그 자격증의 수를 철저하게 제한해 둔다면 그 자격증이 필요한 분야는 어떻게 될까. 게다가 그 자격증이 없으면 그 일은 돌아가지 않게 만들어두었다고 하자. 그렇게 된다면 그 분야의 경쟁률은 엄청나게 솟구치기 시작할 것이다. 그 분야가 얼마나 전문적인 능력을 요구하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수요보다 공급이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몸값은 올라간다.
결국에는 모든 것이 돈이다. 사업을 하지 않는 이상 직업을 통해 벌 수 있는 돈이 클수록 그 분야로 몰리는 것이다. 게다가 정년까지 없으니 금상첨화다. 이런저런 변명은 그냥 수식어에 불과하다. 10년을 그 고생을 하면서 레지던트와 전공의과정을 거치는 것은 그 시간을 보상할만한 충분한 대가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분야고 10년을 큰 소득이 없이 기다리면 그 정도의 보상이 올까. 공부를 잘했기에 그만큼 보상은 충분하다는 능력주의의 허상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중 하나다. 모두가 같은 조건, 같은 노력, 같은 시간을 주고 동시에 출발하지 않는 이상은 그런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의 가장 어두운 이면이다.
불평등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름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성공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어릴 때부터 남다르게 돈을 쏟아붓고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아낌없이 지원을 해주는 대신에 증여세를 물고 경제적인 선물을 주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이상하다. 5,000만 원까지 증여세 면제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가정에서 지불하는 교육비에 턱도 없이 모자랄 텐데 교육은 금전적인 증여와 다른 것일까. 당장 괜찮은 과정의 1년재수를 하는데 4,000만원이 들어가는데 말이다. 공정하다고 믿게 하려면 자신의 능력으로 올라섰다는 지표 같은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한국에서 사교육비가 끝도 모르고 올라가는 것이다. 공정하지 않지만 공정하다는 나름의 타이틀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믿게 만들고 싶은 것이다.
모든 직업에 가능성은 열려 있고 그 가능성에는 어떤 제한도 없어야 한다. 집단 이기주의로 숫자의 장벽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과 나이와 상관없이 언제든지 들어설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막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생애에서 우연히 알게 된 재능은 계발하고 보상해 줄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은 마련이 되어 있을까. 시민적 감수성이나 공동선에 대한 배려 같은 것은 한국사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 과연 이런 사회에서 아이를 낳기를 원한다는 정부의 모든 대책은 쓸모가 있을까.
사회구성원들이 어느 곳에 서있던 지간에 노력과 재능이 허락하는 한 얼마든지 위로 올라설 수 있게 하는 사회인가. 아니면 한 번의 기회로 모든 것이 결정되고 그 기회조차 불공정하게 만들어지는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앞선 후광효과를 지우고 개인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일은 바람직하지만 능력주의의 이상은 개인의 책임에 큰 무게를 지게 한다. 전적으로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책임을 저야 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일까.
어떤 분야든지 간에 열심히 하는 것은 중요하고 그만큼 대가가 주어지는 것도 바람직하다. 그렇지만 그런 노력조차 할 수 없는 원천적인 기회의 차단은 문제가 있다. 이미 특정한 분야는 출발부터 달라야 한다. 그 출발은 이미 자격(?)을 갖춘 부모나 경제력이 있는 조부모부터 시작을 한다. 한국사회는 사회적 이동성이 점점 더 떨어지고 있다. 모든 발전은 융합과 이동에서 만들어진다. 이미 사회계층이 고착화된 사회는 미래에 가능성이 점점 더 떨어진다. 의사증원 2,000명을 둘러싼 논쟁에서 한국사회가 과연 공정을 말할 수 있는 사회인가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