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의 무게

1907년 네덜란드로 떠난 진천 이상설의 발길을 기념하다.

오랜 시간 한반도의 역사에서 외교의 대상은 중국이었다. 일본도 외교의 대상국이긴 했지만 임진왜란 전까지 중요한 무게를 차지했던 적은 많지 않았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 힘의 논리란 중국이 유일했으며 왕조가 바뀔 때마다 충돌이 있기는 했지만 방향성은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강했던 국가 중국이 1840년, 1856년에 영국에게 대패하고 이를 본 일본에게도 1894년 대패하면서 국제적인 힘의 논리는 완전히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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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마다 역사적으로 대표하는 인물들이 있는 진천에는 보재 이상설이 있다. 보재 이상설 선생 생가 인근 진천읍 산척리 135번지 일원에 지하 1층∼지상 1층, 전체 면적 1508㎡(부지 9830㎡) 규모로 기념관을 지은 것으로 준공이 마무리가 되고 개관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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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군 덕문면 산직리에서 태어난 보재 이상설은 1871년에 태어났으며 162cm의 단신이었지만 조선의 독립을 위해 초반에 많은 활동을 했던 사람이다. 그는 조선에서 태어나 대한제국시대를 살았으며 러시아 제국으로 망명해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의 나이가 4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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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에서 외교는 엄청난 무게를 가지게 된다. 대한제국이 완전하게 힘을 잃게 된 것은 1905년으로 국제무대에서 말할 수 있는 자격인 외교권을 박탈당하면 서다. 외교권이 없다는 것은 국재무대에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의미다. 고종은 헐버트를 통해 "보호조약은 병기로 위협하여 늑정(勒定)했기에 전혀 무효하다"는 내용의 급전을 미국 정부에 전달했으나, 미국은 반응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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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재 이상설의 발길을 기념하는 기념관은 조선한옥과 대한제국시기를 연상케 하는 건물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 관직을 돌아가며 일하던 이상설은 1905년 법부 협판, 의정부 참찬을 지냈고 이 시기에 만국 공법 등 법학을 연구하고 번역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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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재 이상설 기념관에는 상당히 높은 국기가 게양대가 자리하고 있다. 게양대 높이는 선생의 순국일인 3월 31일을 기념한 것으로 CJ제일제당으로부터는 1억 원을 기탁받아 높이 33.1m의 초대형 국기 게양대를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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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당시 관료들은 러시아에 기대는 것들이 많았지만 러시아는 이미 1905년에 일본에 대패하고 나서 일본이 하는 모든 행동에 제약을 걸 수 있는 힘은 없었다. 그렇게 계속 국제사회에 알리려고 했으나 힘의 논리로 대한제국은 이미 일본의 속국으로 인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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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개관을 준비 중인 내부를 살펴볼 수 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주창으로 열리는 회의로 40여 개 국의 대표 225명이 참석하는 것인데, 주로 중재재판·육해전법규 등을 논의하지만 사실상 열강 간의 식민지 쟁탈전에 따르는 분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법회의인 만국평화회의가 1907년 6월 헤이그에서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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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前) 의정부참판이었던 이상설과 전 평리원검사 이준(李儁), 전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李瑋鍾) 등 3명을 평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고종은 결정한다. 이준·이상설·이위종 3명의 특사는 '장서'(長書:控告詞)를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제2차 만국평화회의 주최의 주창자이며 의장국인 러시아 정부의 지지와 후원을 기대했지만 러시아의 반응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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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국가 간의 외교는 많은 것을 결정하고 영향을 받게 된다. 국제회의에 참석을 하려고 노력을 하였으나 협회의 회합에 귀빈으로 초대되어 이위종이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라는 제목의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는 것에 그쳤고 이준은 현지에서 병사, 이상설과 이위종은 헤이그 사행 전에 이미 계획된 여정인 각국 순방외교에 나서 한국의 독립과 영세중립화를 역설했지만 궐석재판에서 이완용 내각에 의해 사형·종신형을 받음으로써 끝내 귀국하지 못하고 이국의 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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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의 고종은 헤이그 밀사 사건을 알게 된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 군대의 포위 속에 고종은 순종에 대한 양위의 형식을 빌어 사실상 폐위당했으며 마지막 남은 한국 군대를 해산하였다. 그리고 1910년 한일합방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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