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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27. 2022

멸문지화

성승, 아들 삼문, 삼빙, 삼고, 삼성과 죽다.

조카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은 왜 극렬한 반대에 부딪쳤을까. 우리는 단종에 대한 충심으로 사육신이나 생육신과 초야에 묻힌 수많은 선비들로 기억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이후 그를 왕위에 오른 권신들은 조선을 쥐락펴락했다. 명분을 가지고 왕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 일부 사람들이 수많은 재산과 관직을 차지한 것뿐이 없었다. 세종이 만들었던 태평성대와 문종, 단종으로 이어지던 그 세상은 바뀌어버렸다.

민심이 선택하는 것은 조선왕조나 지금이 그렇게 다른 것은 없다. 그 선택의 결과는 결국 삶과 연결이 될 수밖에 없다. 홍성에 가면 사육신의 대표적인 상징인물인 성삼문 선생 유허비와 그의 아버지였던 성승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성삼문은 죽어서 사지가 찢겼지만 성승은 그 육체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은 세종대에 무과에 급제하여 도총관에 이르렀는데 아들인 삼문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발각되어 함께했던 사람들과 능치처사에 당하게 된다.

아들인 성삼문뿐만이 아니라 삼빙, 삼고, 삼성과 함께 손자 셋이 모두 멸문지화로 죽게 되고 그의 후손들은 후사를 잇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세상이 살기 좋게 바뀌는 데에는 한정된 자원이나 권력을 누군가가 독점하는 데 있지 않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고 그를 왕위에 올렸던 권신들은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지만 세조에 의해 용서가 되었다. 그런 세상을 보지 못했던 성삼문은 집현전의 학자에 불과했지만 단종을 다시 복위시키려고 했었다.

이곳은 유허지로 조선 숙종 2년 이량이 사육신의 의리를 기리기 위해 집 아래에 노은사라는 사당을 세웠는데 숙종 18년에 녹운서원이라고 하였고 숙종 35년에 노은서원이라고 이름을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은 매년 10월 20일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노은서원은 고종 8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고 후에 지방 유학자들이 사육신의 위패를 땅에 묻고 노은단을 세웠다.

3대가 멸족을 당하는 멸문지화는 비극이다. 다른 형제나 가족, 어린아이까지 죄가 없어도 죄가 되는 것이다. 성삼문과 그의 아버지는 옳다고 생각한 대로 행동하였다. 그렇지만 그 결과 그의 가족은 그 이후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항상 선택을 한다.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책임은 뒤따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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