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신시 문화회관에서 만나본 나루 이명환 서예전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섬처럼 살아갈지 길처럼 살아갈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충돌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치유하기도 한다. 자연에서 파묻혀서 세상과 인연을 끊다시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프로그램이 지속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길을 찾아가면서 살아간다.
22일이 마지막 전시였던 서예전을 보기 위해 서산시를 찾았다. 서산시문화회관에서는 서신시민을 위한 다양한 공연을 연중 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벌써 20일이 훌쩍 지나갔지만 서산시 문화회관에서는 독립유공자 후손과 유공 단체 회원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8회 시민과 함께하는 3·1절 기념식이 열렸다.
서예라는 것은 글을 그림처럼 쓰거나 그리는 것이다. 전시전의 이름은 길이다. 사람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오갈 수 있게 된, 거의 일정한 너비로 땅 위에 뻗은 공간적 선형(線形)이 길이다.
전시전에서는 다양한 작품과 글과 글귀가 있었다. 글로 만드는 길은 보이지 않지만 큰 영향을 미친다. 행동하나 보다 글 하나에 사람들은 더 큰 영향을 받는다.
나루의 전시전에서는 사자성어나 하나의 단어를 가지고 풀어나간 글귀들이 걸려 있다. 동양에서는 인생이 곧잘 여행에 비유된다. 사람이 마땅히 취해야 할 심성이나 행위를 도의니 도덕이니 하여 길로써 표현하는 것이 동양적인 생각이나 관념이기도 하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말이 아니면 하지를 말라라는 의미는 평생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가고 싶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는 스스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이곳에 걸린 문구처럼 좋은 기운이 구름처럼 모여드는 것처럼 좋은 일이 있을까. 홀로 있어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언행을 삼간다.
‘길’이란 인간의 의식(衣食)과 주거(住居) 사이를 연결하는 공간적 선형이다. 전시전에 오니 오래간만에 보는 사자성어들이 눈에 뜨인다.
우리말로 ‘길’이라고 읽을 수 있는 단어가 문헌상 처음 보이는 것은 신라의 향가라고 보고 있다. 길은 한자가 아니라 오래된 한글 표현으로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신라의 김생(金生)·최치원(崔致遠)을 비롯하여 고려와 조선시대 명가들의 작품을 모은 것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 것에는 서예가 기반이 되고 있다. 간절히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용기를 내서 그 길을 계속 가다보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간에 그 길은 아름다운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그림과 글이 함께함으로써 메시지가 명확해진다. 섬에서 머무르는 사람과 길을 만드는 사람 중 어떤 길을 선택할까. 예술을 가까이할수록 수많은 작품을 통해 다양한 사람의 가치관과 인생을 이해하며 삶의 경험을 확장해 나갈 수 있다. 우리가 행복의 화가로 부르는 르누아르는 밥을 굶을 때도, 세상이 그의 작품에 돌을 던질 때도, 딸과 생이별했을 때도 굽히지 않고 행복을 그렸다고 한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글을 쓰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것은 비슷한 것이 있다. 완벽한 것은 없지만 표현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밝은 곳은 더 밝게 표현하기 위해서 어두운 곳을 잘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길을 찾고 밝히는 것처럼 오늘도 세상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