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Apr 10. 2024

거칠고 표독스러운

질곡 많은 인생을 살았던 송강 정철이 자리한 진천 정송강사

지금도 그렇지만 정치를 한다는 것은 우아하고 고상한 표현만을 써서 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속한 곳이나 자신의 삶과 정신적인 기반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정적을 제거하기도 했었다. 송강 정철은 탁월한 비유법과 다채로운 언어 구사를 통해 우리말의 묘미를 잘 살린 작품을 남긴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당대에 가장 싸움을 잘하는 정치인이었다. 상대를 공격할 때는 자비가 없었을 정도라고 한다. 

정송강사는 송강 정철(鄭澈)의 위패를 봉안하는 사당으로 경내의 건물은 사당·내삼문·외삼문·홍살문으로 되어 있으며, 내삼문과 외삼문 사이의 좌측에는 송강 기념관이 만들어져 있다. 

정송강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조선 가사문학의 대가로 불리는 송강 정철과 관련된 문화창조마을을 조성중에 있었다. 이번 사업은 2020년 충청유교문화권 광역관광개발사업으로 선정돼 추진하는 것이다. 이곳에는 연면적 2057.94㎡(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의 송강 문학체험관과 660㎡ 규모 문학창작마을이 들어설 예정이다

정송강사는 진천군에서도 떨어져 있는 곳이서 한가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는데 문인들이 이곳에 머무르며 작품활동을 할 수 있고, 일반 방문객들도 이용할 수 있게 되면 지금과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자연을 사랑했고 풍류를 좋아했던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관찰자로서의 자신과 풍류객으로서의 자신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뿐만이 아니라 50세 때 조정에서 물러나 불우하게 지낼 때 선조에 대한 연군의 정을 남편을 잃은 여인의 마음에 빗대 사미인곡에서 표현하기도 했다. 

자연의 변화에는 이유가 없다. 조정의 중요요직을 겸하면서 서인의 영수로 명종 시대부터 선조 시대까지 붕당 정치의 한가운데 있었는데 수많은 사회를 일으킨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그런 삶 때문이었을까. 여러 번 파직과 유배를 거듭한 끝에 만년에는 남인의 모함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강화도 송정촌에서 칩거하다 선조 26년인 1593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길지도 않은 삶에서 어떤 선택이 좋은 결과를 만들게 될지에 대해 알 수는 없다. 지나고 보면 그 선택이 어떠했는지 알 수가 있을 뿐이다. 우울의 망령에 완전히 정복당하고 나면 사람의 영혼엔 오직 분노만이 남게 된다.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 사람이지만 송강 정철의 삶은 권력과 시련을 반복하는 삶을 살았다. 권력의 속성을 잘 알았기에 그 칼을 어떻게 쓸지도 알았던 사람이다. 후대에는 그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은 기록에 불과하고 문학적인 성과만 기억이 될 뿐이다. 

임진왜란 바로 3년 전인 1589년 기축옥사 때 역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동인의 인사 1,000여 명을 처형하고 수백 명을 귀양 보내면서 동인과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면서 원한을 사게 된다. 

내년이 되면 완료가 될 송강 문학체험관에는 정철의 일대기와 그의 작품이 등이 전시가 될 예정이다. 송강정철과 율곡 이이는 동시대를 살았던 같은 나이의 사람이다.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던 율곡과 직선적이며 공격적이었던 송강은 전혀 다른 성향의 사람이었다. 송강의 좋은 점과 나쁜점을 잘 살펴주었던 율곡은 1584년 4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송강 정철은 가장 슬퍼했다고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녹색의 토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