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거칠고 표독스러운

질곡 많은 인생을 살았던 송강 정철이 자리한 진천 정송강사

지금도 그렇지만 정치를 한다는 것은 우아하고 고상한 표현만을 써서 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속한 곳이나 자신의 삶과 정신적인 기반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정적을 제거하기도 했었다. 송강 정철은 탁월한 비유법과 다채로운 언어 구사를 통해 우리말의 묘미를 잘 살린 작품을 남긴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당대에 가장 싸움을 잘하는 정치인이었다. 상대를 공격할 때는 자비가 없었을 정도라고 한다.

MG0A8613_новый размер.JPG

정송강사는 송강 정철(鄭澈)의 위패를 봉안하는 사당으로 경내의 건물은 사당·내삼문·외삼문·홍살문으로 되어 있으며, 내삼문과 외삼문 사이의 좌측에는 송강 기념관이 만들어져 있다.

MG0A8615_новый размер.JPG

정송강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조선 가사문학의 대가로 불리는 송강 정철과 관련된 문화창조마을을 조성중에 있었다. 이번 사업은 2020년 충청유교문화권 광역관광개발사업으로 선정돼 추진하는 것이다. 이곳에는 연면적 2057.94㎡(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의 송강 문학체험관과 660㎡ 규모 문학창작마을이 들어설 예정이다

MG0A8618_новый размер.JPG

정송강사는 진천군에서도 떨어져 있는 곳이서 한가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는데 문인들이 이곳에 머무르며 작품활동을 할 수 있고, 일반 방문객들도 이용할 수 있게 되면 지금과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MG0A8621_новый размер.JPG

자연을 사랑했고 풍류를 좋아했던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관찰자로서의 자신과 풍류객으로서의 자신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뿐만이 아니라 50세 때 조정에서 물러나 불우하게 지낼 때 선조에 대한 연군의 정을 남편을 잃은 여인의 마음에 빗대 사미인곡에서 표현하기도 했다.

MG0A8626_новый размер.JPG

자연의 변화에는 이유가 없다. 조정의 중요요직을 겸하면서 서인의 영수로 명종 시대부터 선조 시대까지 붕당 정치의 한가운데 있었는데 수많은 사회를 일으킨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그런 삶 때문이었을까. 여러 번 파직과 유배를 거듭한 끝에 만년에는 남인의 모함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강화도 송정촌에서 칩거하다 선조 26년인 1593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MG0A8628_новый размер.JPG

길지도 않은 삶에서 어떤 선택이 좋은 결과를 만들게 될지에 대해 알 수는 없다. 지나고 보면 그 선택이 어떠했는지 알 수가 있을 뿐이다. 우울의 망령에 완전히 정복당하고 나면 사람의 영혼엔 오직 분노만이 남게 된다.

MG0A8632_новый размер.JPG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 사람이지만 송강 정철의 삶은 권력과 시련을 반복하는 삶을 살았다. 권력의 속성을 잘 알았기에 그 칼을 어떻게 쓸지도 알았던 사람이다. 후대에는 그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은 기록에 불과하고 문학적인 성과만 기억이 될 뿐이다.

MG0A8635_новый размер.JPG

임진왜란 바로 3년 전인 1589년 기축옥사 때 역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동인의 인사 1,000여 명을 처형하고 수백 명을 귀양 보내면서 동인과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면서 원한을 사게 된다.

MG0A8637_новый размер.JPG

내년이 되면 완료가 될 송강 문학체험관에는 정철의 일대기와 그의 작품이 등이 전시가 될 예정이다. 송강정철과 율곡 이이는 동시대를 살았던 같은 나이의 사람이다.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던 율곡과 직선적이며 공격적이었던 송강은 전혀 다른 성향의 사람이었다. 송강의 좋은 점과 나쁜점을 잘 살펴주었던 율곡은 1584년 4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송강 정철은 가장 슬퍼했다고 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녹색의 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