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대한 본질을 모른 여성의 비극적인 결말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그런 것에 대한 본질을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결혼하고 이혼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못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상대에게 그 문제를 찾는다. 일방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이혼하는 부부들은 각자에게 그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을 희석시키고 싶을 뿐이다. 한국사회의 가장 큰 괴리는 남녀평등은 예전과 달라졌는데 불구하고 남자에게는 가부장적인 시대의 책임감을 요구하고 여자는 충분히 평등한 권리를 누림에도 불구하고 여성으로서의 책임감에서 자유로워지려고 한다는 것이다.
가정의 달이라는 5월에 검찰은 이혼 소송 중인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대형 로펌 출신 변호사 A 씨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A 씨는 지난해 12월 서울 종로구 소재 주상복합아파트에서 별거 중인 40대 아내를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A 씨의 아버지는 검사출신의 다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범행 직후에 남편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는 것을 충격적이라고 하지만 사실 충격적일 것도 없다. 가해자가 형벌에서 가벼워지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다. 우리는 세상을 너무 도덕적으로 보려고 하는 데 있어 시야를 흐리게 된다.
사건의 본질은 살해할 의도가 있었는가와 상해치사로 보일 수 있을 만큼 우발적이었냐는 것이다. 우선 살해도구가 집안에 있는 고양이와 관련된 물건인 장난감 금속 파이프다. 이들 부부는 이미 두 번째로 이혼 소송을 시도하고 있어서 멀어질 대로 멀어진 사이였다. 사실 부부와 사이에 일어난 일은 정확하게 알기란 쉽지가 않다. 분명한 것은 우발적이던 의도를 가지고 있든 간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알에서 이들 부부를 조명한 것을 보면 가장 흔하게 등장한 것이 남자의 적극적인 구애다.
만나는 사이도 아닌 일방적인 스토킹을 제외하고 남녀 간 수많은 사건사고의 중심에는 주로 남자들의 적극적인 구애가 있었다. 그 기간만큼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이 여자에게 모든 것을 다해주는 남자는 그 단계만 지나고 나면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만약 여자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걸 가지고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반면 여자는 그렇게 해준 모습을 베이스에 두고 시작을 한다. 남자는 그때까지 했던 것을 돌려받으려고 하고 혹은 무능력해서 원만한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없기도 하다. 둘 사이의 관점은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는데 그 관계가 정상일 수는 없다.
그알에서 피해자는 유능한 여성으로 등장한다. 사실 유능하다는 기준도 잘 모르겠다. 방송에서 유능하다고 생각되는 수많은 여자들이 그렇지 않은 선택을 하는 경우를 보아왔다. 자신의 분야에만 집중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의 본질을 놓친다면 그것이 유능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사람을 잘 못 만나는 것은 자신의 분야에서 아무리 유능하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가 의미가 없을 수도 있을 만큼 큰 문제를 야기한다. 이번 사건처럼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다.
금전적 혹은 외부로 보이는 것이나 말로 현혹을 하더라도 그 모든 것에 대한 포장을 지워내고 남아 있는 그 사람만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 사건의 일부만 보았지만 부부는 문제가 곪을 때로 곪았으며 여자가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어찌 보면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살아온 어떤 환경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게 한다. A 씨는 자신의 자식에 대한 과도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이 아이에게 실려 있다는 의미다. 그 정체성을 빼앗으려는 상대방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정체성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정체성을 자식에게서 찾는 경향이 있다. 진정한 정체성은 자신 내부에 있는 것이지 외부에 있지 않다. 정체성을 외부에 맡긴다면 그것은 외부에 평가에 민감하다는 의미이고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순간 폭력성이 극대화될 수가 있다. 재편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남녀를 보는 관점에 대해 과거에서 벗어날 필요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