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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y 12. 2024

퇴로 없는 사회

의대생의 옛 여자 친구 살인사건이 보여주는 한국사회 

사회와 강제로 떨어져서 고립되는 환경에 놓이는 결정을 하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누군가를 살해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는 것은 이미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사람의 삶에는 항상 원인과 결과가 있지만 결과가 원인에 영향을 받을 수는 있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 사람의 동기가 모두 같은 무게로 동작하지는 않는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퇴로 없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단지 분노가 넘치고 거부당했기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겨 사람을 죽이는 단계까지 간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절을 당하거나 자신이 주도하는 일이 실패라고 생각되는 결과로 나오게 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그런 환경을 견디지 못하면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 일어난 대표적인 사건은 20대 의대생의 옛 여친의 살해사건, 40대 남자의 40대 여성 살해사건, 50대 유튜버의 다른 50대 유튜버 살해사건이다. 만약 이들의 의도를 미리 알고 한 달 정도를 감옥체험을 하게 해 주었다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언론은 항상 사건이 발생하면 너무나 즐거운지(?) 자극적으로 쏟아내기에 바쁘다. 그들은 그 상황이 너무 즐거운 모양인지 온갖 추측성 기사들을 만들어낸다. 돈이 되는 이 상황을 즐거워하면서 마치 악한 가해자 안타까운 피해자의 구도를 만드는데 집중을 한다. 왜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는 사실 깊숙하게 들어가 보면 알 수 있을지는 모른다. 사람들은 바로 앞의 삶이 있기에 단편적인 정보만을 보고 판단을 한다. 이미 결과는 나와버렸고 그걸 자신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퇴로 없는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일까. 서로 간의 생각차이를 확인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계가 악화되기 전에 얼굴로 대면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렇지 않다면 통화로 하는 것이 좋고 될 수 있으면 문자나 카톡으로 오해할 수 있는 상황에서 대화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렇지만 극단적인 결정을 하는 사람은 이미 얼굴을 보기도 전에 충분히 분노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어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만들게 될지에 대해 사고하지 못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요즘 들어 살인도 하나의 콘텐츠가 되어버렸다는 느낌마저 든다. 사람이 죽는 것조차 하나의 경험이 되어버리는 것은 유튜브와 같은 채널의 확산도 있다. 이미 제삼자가 되어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는 것이 돈을 벌기 위해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공감을 해주는 곳에 있으면 자신이 하는 짓에 대한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된다. 유튜버가 하는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는데 이에 대한 반박을 하게 되면 더욱더 강력하게 주장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 것과 손해가 될 수 있는 것에 대해 더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 40대 남자가 인수한 음식점의 40대 여자의 권리금 요구에 살해로 답한 이유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살해한다는 것은 퇴로 없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어떤 의사결정을 할 때 그 행동이 어떤 미래를 만들지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이 더 없어지고 있다는 것은 병리적인 관점으로 볼 때 더없이 불행한 한국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실 자기 방임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 이면에 실패나 거부당하는 것 자체가 일어설 수 없는 단계로 나가게 된다는 가장 큰 문제가 있다. 여자친구를 살해한 '수능 만점' 의대생 최모(25)씨 사건 피해자 A 씨(25)의 장례식이 지난 10일 엄수됐다고 한다. 유족 측은 분통을 터트리며 강력한 처벌을 희망했다. 의대생 내면에 잠재해 있던 비뚤어진 욕망, 욕구불만이 유급으로 인해 밖으로 분출됐고 이것이 살인이라는 끔찍한 결과로 이어졌을 수 있다고 프로파일러들은 분석했다.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나 다할 수 있는 그런 분석을 하면서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아하다. 


인간의 생명조차 가볍게 되어버렸으며 그 자체도 콘텐츠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결정을 내리는 것이 수월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사람은 누구나 선택을 한다.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고 자신의 존재조차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는 요즘 타인에게 극단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의 인성이 사라진 좀비와 같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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