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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y 20. 2024

성왕이 죽다.

관산성으로 가던 길목 옥천의 구진벼루에서 잡히다. 

그녀와 전화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닿은 곳이 봄 길과 물길이 어우러진 고장의 옥천이었다. 그녀는 이곳을 찍고 있는 것을 몰랐겠지만 이날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을까. 금강 따라 산책로가 수려하고, 대청호에 합류하는 물줄기들은 풍요로운 모습을 만들어내는 곳이 바로 옥천이다. 금강은 흘러 군북면 이평리 대청호에서 ‘아름다운 서쪽의 냇가’ 서화천(西華川)을 만들어내고 소옥천(小沃川)이라고도 불리며, 아픔다운 풍광을 간직하고 있는 금강 지류다. 

나라의 기운이 점점 쇠약해지고 있었을 때 무령왕의 아들인 성왕은 신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의 남진 압력에 대항을 했었다. 고구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공주로 도읍을 옮긴 것과 달리 현재의 부여로 천도한 것은 계획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당시에 그 지역의 토착 신진 세력이었던 사 씨(沙氏, 沙宅氏)의 정치적 지지가 맞물린 결과였다.  

이곳은 옛 지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석벽이다. 금산에 가면 적벽으로 이어진 길의 적벽강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손을 잡고 있었던 신라는 기습적으로 한강 지역을 차지해 버리게 된다. 이에 분노한 성왕은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관산성을 공격하기로 결정을 한다. 

관산성의 위치는 백제 성왕사절지(聖王死節地)로 전해지는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9-3번지 부근과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약 800m 떨어진 있는 환산성(環山城)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환산에서 이곳은 직선거리로 약 6km 정도 떨어져 있다. 아들 창이 관산성 전투에서 몰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성왕은 근위병 50여 명만 이끌고 554년에 이곳을 지나 관산성까지 가려고 시도했지만 이 정보는 신라군에게 흘러들어 가게 된다.  

이곳까지 왔지만 성왕은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무력장군에게 붙잡히게 된다. 그리고 이곳 구진벼루에서 참수당하게 된다. 잘린 성왕의 머리는 신라로 가져가 누구나 밟고 걷는 길의 아래에 묻어 치욕을 당하게 하였다. 백제가 크게 패배하여 성왕(聖王)과 좌평 4인, 군졸 2만 9600여 명이 전사하는 데에 구진벼루는 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이곳의 지명 등은 성왕의 이름을 따두었다. 길은 성왕로이며 다리는 성왕교라고 명명이 되어 있다. 옥천은 부여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에서 가장 중요한 지리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옥천은 두 국가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수많은 산성들이 있었다. 

백제의 도움을 사비(부여)로 옮겼지만 신라의 위협등에서 더 자유롭기 위해 현재 익산으로 도읍을 옮기려는 시도는 있었다. 그렇게 되었다면 옥천과 더불어 완충이 되는 지역이 늘었을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과 성왕으로 이어지는 백제의 제2 전성기는 끝내 부활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성왕이 구진벼루에서 참수가 된 다음에 백제의 국운은 점점 약해지고 왕권중심이 아니라 귀족중심의 사회로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100년쯤 후에 백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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