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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17. 2024

밀양 집단 성폭행

어떤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둔감함을 넘어 짓밟는 것을 즐긴다. 

최근 밀양 집단 성폭행과 관련된 가해자들의 신상이 공개되면서 사회가 시끄러워지고 있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여중생을 당시 고등학생 44명이 집단 성폭행 사건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당시 학생들이었고 성인이 아니었기에 매우 가벼운 처별을 받았다는 점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형사적인 처벌을 받고 감옥등에서 일정시간을 있거나 무기징역을 받는 것은 처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권리의 일종이다. 그게 왜 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신이 저지른 범죄로 인해 생명을 위협받지 않고 가능한 안전한 곳에서 그 시간 동안 격리되어서 삼시세끼 챙겨주면서 국가의 예산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정말 엄청난 사건이 아닌 경우 재판부는 웬만하면 사형을 선고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사형은 일정기간의 격리가 아니라 완전한 종결을 의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한국에서 사형을 선고해도 사실 집행하고 있지는 않다. 사적인 보복을 허용하지 않는 이유는 그래서 이 사회가 지탱될 수 있기 때문이며 그 이면에는 사법정의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정몽주의 단심가처럼 표현된 것처럼 일백 번 고쳐 죽어야 할 사람들도 분명히 세상에는 있다. 우리는 어떤 정의를 생각해야 되는가. 


밀양 여중생 집단 강간 사건은 2004년에 일어났다. 울산에 살던 최모양을 유인해서 밀양시 가곡동의 여인숙 등지에서 성폭행한 것이었다. 그 사건을 보았을 때 고등학교 1학년때 경험했던 사건이 있었다. 당시는 인문계를 가기 위해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중학생들이 재수를 하기도 했었는데 친구도 재수를 했었다. 개인적으로 그 친구는 공부를 해서 무언가를 할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부모님의 마음은 그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공부하라고 재수를 시켰지만 매일 불량스러운 애들과 놀러 다니면서 학원을 다녔다. 인문계를 가기 위해 재수한다는 것이 살짝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만큼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그러 더가 어느 날 집으로 찾아와 재미있는 것을 들려주겠다고 했다. 테이프 하나를 가져왔는데 그 테이프에는 중학생 여자학생과 네 명의 재수생이 윤간을 하는 것을 녹음을 한 것이었다. 그때 받은 충격은 상당했었다. 여자애의 신음소리가 좋아서 그러는 것인지 싫어서 그러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 그렇게 사람이 살아갈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만나지 않지만 그 친구는 그것이 하나의 놀이처럼 생각되었던 모양이었다. 


2004년 밀양 사건이 발생했을 때 추가로 2명의 피해자를 확인했지만 피해자는 신상 노출을 우려하며 수사 협조를 거부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에 가장 큰 문제는 경찰들이었다. 성폭행은 지금은 본인이 고발하지 않아도 인지가 되면 수사가 가능하지만 당시에는 피해자가 고소하지 않거나 중간에 취하를 하면 더 이상 수사를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여러 명이서 강간하는 경우 특수강간으로 얼마든지 수사가 가능했었다. 당시 경찰들은 개별로 구분해서 수사를 했다. 즉 특수강간이 아닌 개별적 일반 성폭행사건으로 취급을 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 부모들은 더 가관이었다. 아이들의 일탈을 보면 딱 그 부모가 보인다. 부모가 마음이 바로 서있는데 아이들이 그런 짓을 하는 집안은 거의 없다. 안 그런 척해도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닮는 것이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개차반이라면 부모도 개차반이거나 방임 혹은 무조건적인 마피아식 사랑(?)을 베풀어주는 것이다. 자신의 손가락에 박힌 작은 나무가시에는 발악을 하면서 상대에게서 흘리는 피와 고통은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2004년의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은 향후 밀양이나 한공주에서 재구성해서 개봉하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는 엄청나게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소시오패스가 될 정도로 머리가 좋지는 않았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모습은 거의 없었다. 상대가 이기적인 것을 보려면 자신처럼 상대를 대하지 않으며 약속을 어기는 것을 밥먹듯이 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 중에 아무렇지 않게 시간 약속을 과하게 어기고 그것도 자주 하는 사람치고 괜찮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당시에 목소리로만 들었던 그 여학생도 40대를 훌쩍 넘었겠지만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 약간 궁금해졌다. 


학생들이지만 학생 같지 않은 아이들도 얼마든지 많다. 44명의 학생들 중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밑바닥에는 다른 사람을 해하더라도 자신의 즐거움을 꾀하려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범죄를 위한 그룹을 만드는 것은 그만큼 죄책감을 덜려고 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홀로 할 만큼 강인하지는 못한 비열한 마음이 누군가와 함께 하며 책임을 나누는 것이다. 아무리 주변에 친구가 없어진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생각할 때 올바르지 않은 신념이 있다면 어울리지 않는 것이 좋다. 필자의 경우 어릴 때 담배가 어떤 즐거움을 주는지는 생각지도 않고 그냥 어울려서 피는 아이들이나 당시 껄렁한 애들이 당구를 모여 쳤던 경우가 많아 그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공부라던가 무언가를 하려는 것보다 그냥 그 자체가 바르지 않다는 신념 하나로 그렇게 행동했다. 좋아 보이고 쿨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말 좋은 것을 보고 선택하는 것을 했다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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