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에 자리한 이승복 생각과 기념관
지금까지 역사 이전의 시대라는 선사시대를 지나 역사시대를 맞이하고 많은 시스템과 제도들이 등장했다. 오랜 시간 봉건시대를 지나서 유럽 등에서는 자유와 평등등을 기본으로 하는 제도가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한국은 의도하지 않게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맞이하여 많은 충돌이 일어났었다. 자본주의는 제도가 아니라 경제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자본주의는 민주적이지 않기에 유럽이나 미국등에서는 끊임없이 수정과정을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다.
어릴 때 이승복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았던 사람이 없을 정도로 반공주의를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사람의 이름이다. 부모님보다 더 어린 나이였던 이승복의 죽음은 치열한 이념대립의 희생의 이름으로 자리 잡아왔다.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중에 공산당이 좋아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남겼다는 것으로 유명해졌지만 사실 북한 공비에 의해 희생이 되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옛날에 이승복이 살았던 집을 재현을 해두었다. 직접 가서 보면 알겠지만 정말 힘든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화전민으로 야초와 잡목을 태워버리고 농경지로 사용하여 생활하는 유랑민이었다. 한국전쟁 이후에 식량난으로 인해 많이 증가했었다.
화전민이 살았던 집을 보면 선사시대에 사람들이 살았던 집과 그렇게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열악하게 보인다. 이승복은 1959년생으로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1959년생이니 지금 살아 있다고 한다면 60대이다. 지금보다도 그렇게 많은 나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대립과 갈등이 지속되는 것은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더 많은 피해를 입힐 수밖에 없다. 최대한 완화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나 미래사회의 관점으로 볼 때 더 바람직한 전략이라고 보인다.
1982년에 평창군에 이승복이 다녔던 모교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기념관에는 본관 전시실을 비롯한 총 6개의 전시실에는 이승복의 생애를 기록한 유화 13점을 비롯하여 북한 공산군 장비 106점, 유품 33점이 주제별로 전시되어 있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필자가 군대제대를 한 것이 9월 12일이었는데 3일 뒤에 강릉으로 잠수함이 침투했었는데 만약 3일만 늦었다면 길게는 한 달을 더 군대에 있었어야 했었다. 필자가 있었던 작전구역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예비로 대기를 했어야 했던 사건이었다.
학교 운동장에 해당하는 바깥 공간에는 전쟁당시 사용되었던 전투장비와 헬리콥터, 정찰기 등 실물 전투장비도 전시되어 있다.
아마도 평창군에 이승복 기념관이 만들어져 있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강원도 평창군에는 이념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故이승복 어린이 사건은 지난 1968년 10월 30일 울진·삼척 무장공비 120명 침투사건 당시 일부 잔당들이 집으로 숨어 들어와서 가족을 모두 학살했던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