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Jun 25. 2024

소수의견

법이라는 것은 소수의 생각을 묻지도 듣지도 않는다. 

법치주의와 법률주의는 그 의미가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법대로 하면 무언가 해결이 될 것 같지만 법대로 하면 돈과 시간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부족한 시간은 누군가의 시간을 사서 이용하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 시간을 살 수 있는 여력이 많지가 않다. 검찰이 누군가를 괴롭히기 위한 방법으로 잘 사용하는 것이 모든 것을 털어서 모자이크같이 그림을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전혀 상관없었던 사건 A와 C가 엮이는 순간 인과관계가 없어도 무언가 있는 것처럼 만들어진다. 문제는 그 말도 안 되는 그림을 해석하고 쪼개는 것은 개개인의 몫이라는 것이다. 사법부는 그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한 진실성을 파헤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소수의견은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생겨날 수 있는 현실 속의 사건을 가지고 만든 영화다. 피고는 경찰이 아들을 죽였다고 하고, 검사는 철거용역이라고 한다 원고 국민, 피고 대한민국을 상대로 진실을 묻는 재판을 이끌어가는 것은 지방대출신에 경력도 좋지 않은 국선변호사 윤지원이 강제철거 현장에서 열여섯 살 아들을 잃고, 경찰을 죽인 현행범으로 체포된 철거민 박재호의 변론을 맡으면서 생기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서민 혹은 일반 국민들은 자신의 일이 아닌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감시의 눈을 가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약자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 철거문제 혹은 전세사기, 각종 투자사기를 당한 사람들 치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 않다.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 있을 때는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타인의 고통이나 문제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그 사기가 자신의 일이 될 때 그제야 문제를 깨닫게 된다.

법률주의가 위험한 이유는 법으로 인해 모든 것을 정당화시키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생활패턴에서 무척이나 불편하지만 이유가 없는 법들이 있다. 그 법을 제정함에 있어서 언론에 노출이 되던가 누군가가 필요에 의해 만들었을 때 법은 사람을 옥죄는 수단이 된다.. 그토록 악의 축으로 생각되는 히틀러 역시 당시 독일은 유대인을 몰아넣고 학살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만들었다. 법치는 법이 가진 문제점을 깨닫고 수정해 가며 다수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법률주의는 법으로 모든 것을 다한다는 의미다. 그 과정 속에 법률 전문가가 가장 큰 이득을 본다.  

얼마 전 한 정치인이 언론에 대해 개라고 표현한 적도 있다. 사실 개가 된 것도 사실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어떤 사고나 생각 같은 것은 없다. 그냥 돈이 되면 마음껏 퍼 나르고 실력도 없는 글 심지어 비문과 말도 안 되는 말들을 섞어가면서 마치 기사처럼 써 내려간다. 언론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어떤 것이 가치가 있는지도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걸 알았다면 한국이라는 배가 이런 식으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소수의견에서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사람은 검사로 등장한 오연아라는 배우였다. 법률가가 가져야 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까. 전달해야 될 것과 제약되어야 할 것 그리고 사람을 상대로 어떻게 설득할지에 대해 잘 보여준 배우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라고 착각하고 노력하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알게 되는 것은 10대 초반이면 된다. 한국 사회가 계급사회가 아니라고 말은 하지만 그건 고위직들이나 군장성들의 생각을 보면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소수의견은 그냥 소수의견일 뿐이다. 영화 속에처럼 그렇게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아주 극소수만이 어쩌다가 만나는 경험에 불과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사이드아웃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