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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삶의 궤적

유학생, 독립운동가, 정치인의 삶을 살았던 정읍 나용균생가

사람이 그 순간을 감추고 속일 수는 있지만 긴 안목으로 보았을 때 삶의 궤적은 속일 수는 없다. 정직하던 부정직하던 욕망이 넘치든 간에 그건 쉽게 변하지 않는다. 물론 극적으로 변하는 삶의 이벤트가 있다면 조금 궤도는 변경이 될 수 있지만 그런 경우는 많지가 않다. 어떤 사람의 본질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의 보이지 않은 궤적이 그려지는 것이지 선입견으로 예단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목소리, 눈빛, 행동은 마치 지문처럼 그 사람의 고유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숨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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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대한민국 성장기의 정치인들과 지금의 정치인들의 지향 목적이 다르다. 지향하는 바도 다르고 왜 그런 삶을 사는지에 대한 목적하는 바가 다르다. 사람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 사람의 말만 달라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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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에 가면 본관이 나주인 나용균의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당시 일본의 와세다대학에 유학까지 할 정도로 집안도 풍족하고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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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봉 나용균은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원칙 발표와 제1차 세계대전 종결로 인한 식민지국가의 독립분위기에 따라 동경에서 백관수(白寬洙) · 김도연(金度演) 등 유학생들과 함께 동경 일대의 한국인 유학생을 동원하여 독립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독립활동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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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태어났던 생가의 원형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당대에 상당한 부를 축적했던 경우가 많다. 해외를 전전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나용균은 광복 이후에 정치인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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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의 구조를 보면 광복 이후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눈에 뜨인다. 정읍 나용균 생가(정읍시 영원면 운학리 164-1·소유자 나영호외 2명)는 사랑채·문간채·고방 등 3동(1층)으로 이뤄져 있고 지난 189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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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자유당 때에 야당의 후보로 정치활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전라북도 정읍군 갑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처음 정치에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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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국민당 후보로 전라북도 정읍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김창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전라북도 정읍군 갑 지역구에 출마하여 자유당 김창수 후보에 설욕하고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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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용균 생가의 현재 안채는 주초석 일부만이 남아 있고 사랑채, 문간채, 고방이 보존되어 있으며 생가 가까운 곳에 사당이 있다. 사당은 문학마을 어귀에 자리하고 있으며 솟을대문을 세우고 대지 경계에는 한식기와를 올린 토석담장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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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성향이 다른데 그 성향에 맞는 직업이 있다. 특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정치인들의 삶의 선택은 다른 사람과 같을 수는 없다. 그렇게 정치인의 삶을 살면서 대통령선거에도 나갔으며 국회부의장도 역임했던 나용균은 1977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서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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