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이름을 만든 함양의 개평마을
한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부모의 유산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은 많지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아직까지도 장자 상속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임진왜란 이후에 장자 상속을 기본으로 하는 차등 상속이 점점 심화되었는데 장자 상속이란 재산을 장자에게 몰아주고 제사를 전담하게 하는 것이므로, 같은 혈족 중에서도 제사를 주도하는 종가를 중심으로 주도권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종가를 중심으로 재산이라던가 권한 같은 것이 커질 수밖에 없다.
개평마을은 함양군에서 가장 먼저 양반들이 마을을 이룬 반촌이다. 일두 정여창으로 대표되는 하동정 씨와 풍천 노 씨도 입 향해서 터를 잡고 살았다. 개평마을은 도숭산 천황봉 아래로 이어지지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장자상속문화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할 때 개평마을은 조성이 되기 시작했는데 일두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도학자인 동시에 성리학자로 이기론, 심성론, 선악천리론 등의 사상을 기초로 소학과 가례의 실천적 효행에 모범을 보였다고 한다.
하동 정 씨는 서인에서 노론의 주축을 이루고 풍천 노 씨는 남인의 주축을 이루기도 했으니 집안의 성향이 다르다고 볼 수가 있다. 하동 정 씨는 성리학적 이상을 추구하고 정치·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위치를 공고히 했지만 풍천 노 씨는 학문적 실천과 실리적인 면을 강조했다고 한다.
개평마을에 자리한 집들을 보면 규모면에서 하동 정 씨의 집들이 풍천 노 씨의 집들보다 규모가 있다. 즉 집안의 경제적인 규모나 기반이 하동 정 씨가 후세 했다는 의미다.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집안을 지탱하는 것은 경제적인 것을 외면할 수가 없다.
개평마을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걸어보면 알겠지만 양반들이 주로 모여 살았던 곳과 평민들이 모여 살았던 곳 그리고 천민들이 살았던 곳으로 구분이 된다. 반가의 주거지는 중앙 부분에 기다란 영역을 이루면서 평민들의 공동 영역과 명백하게 구분되어 있다. 경제적인 것이나 사회적 위치에 기반에서 주거지가 달라지는 것은 과거나 현재나 다를 것은 없다.
마을을 흐르는 하천은 옥계천으로 남쪽에 마을 초입에 집들이 있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양반들이 거주했던 공간들이 나온다.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하동 정 씨 대종가와 그 아래로 풍천 노 씨 대종가, 오담고택, 노참판댁 고가 등 한옥들이 흙담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모여있다.
고택도 좋고 돌담길을 걷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술에 관심이 많은데 개평마을은 500여 년 전통의 가양주인 지리산 솔송주의 특산지로도 유명하다. 언제 기회가 되면 지리산 솔송주를 한 잔 마셔봐야 할 듯하다.
함양이 지리적으로 남쪽에 자리하고 있어서 대부분의 고택들의 형태는 남부 지방의 특징인 개방형이며 독립된 채들로 구성되었지만 사대부 집답게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문채를 지나자 눈앞에 널찍한 공간이 펼쳐진다. 정면 여섯 칸에 측면 한 칸인 5량가로, 300년 이상 된 一자형이다.
지금이야 신분의 차이가 없어졌지만 19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이 마을의 분위기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종가로 이어지는 문화와 유산이 있었던 곳에 문화가 있었으며 평민대로 양반대로 집안의 문화를 이어온 흔적이 남아 있다.
민가는 공공 건축과 구분되는 사적 건축물을 뜻한다. 함양 일두고택, 함양 노참판댁 고가, 함양 개평리 하동정 씨 고가등은 모두 전통 정원으로 지정이 되어 있다고 한다. 고택에 기대어 전통 생활문화 보고, 느끼고, 배웠던 하루 고택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돌아볼 수가 있다.
개평이라는 지명은 두 개울이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에 마을이 위치해 ‘낄 개(介)’ 자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유래되었다. 사람은 가슴속에 어떤 것을 함양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모습이 달라진다고 한다. 좋은 것도 좋지 않은 것도 담는 것은 사람의 의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