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의 동춘당 송준길을 모신 경북 상주의 흥암서원
필자의 어머니는 먹고 싶었던 짜장면을 일부러 싫다고 하신 분은 아니었지만 일제강점기와 그 체계를 그대로 이어받은 교육시스템의 고정관념을 그대로 가지신 분이었다. 어머니가 항상 하던 말 중에 하나가 조선이 망한 이유 중에 하나가 양반들끼리 당파를 나눠 싸웠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야당과 여당의 공감하기 힘든 정치싸움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맹자, 논어, 대학, 중용의 의미를 왜곡해서 생각하고 계셨다.
조선의 역사 속에서 정치적인 대립을 했던 당파들은 분명히 있었다. 필자는 부모님이 했던 말을 확인하기 위해 당시에는 어렵지만 논어와 맹자를 읽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조선의 역사에 대해 접하게 되었고 생각하기에 따라 다른 길을 걸었지만 적극적인 소통을 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상주라는 도시는 경상북도의 다른 지역처럼 산악으로 이루어진 도시가 아니라 호남의 도시처럼 들판이 있는 도시다. 경상북도의 중심이었던 도시 상주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정치세력을 품었던 지역이다. 여러 역사적인 장소 중에 흥암서원은 대전 송촌동에 자리한 동춘당 송준길을 모신 곳이기도 하다.
풍요로운 느낌이 드는 공간에 상주 흥암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인조 때 상복 논의가 일어날 때 다른 당파의 우복 정경세와 논산 돈암서원의 사계 김장생은 1년짜리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서로 의견을 이해하게 된다.
사계 김장생은 동춘당 송준길의 스승이며 율곡 이이를 잇는 기호학파의 예학을 대표하는 사람이었으며 정경세는 영남학파였다. 각각 서인과 남인을 대표하며 경쟁과 대립의 양대 세력을 이끌었다. 그렇지만 상대방의 의견에 열린 자세로 대했다.
동춘당 송준길이 이곳에 머물게 된 것은 스승인 김장생 덕분이었다. 퇴계학을 계승하였지만 정경세는 고질적인 정치판을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김장생에게 학문을 토론하고 소통을 시도하였다. 그런 시도는 자연스럽게 제자 송준길이 정경세의 둘 때 딸의 사위가 되는 과정으로 이끌게 된다. 대전 회덕에서 살았던 송준길은 처가였던 상주로 와서 10년을 보내면서 제자까지 길러낸다.
송준길은 장인이었던 정경세를 통해서 퇴계학을 접하게 된다. 1702년(숙종 28) 지방유림의 공의로 송준길(宋浚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곳이 흥암서원이다. 경내 건물로는 흥암사(興巖祠)·진수당(進修堂)·집의재(集義齋)·의인재(依仁齋)·어필비각(御筆碑閣) 등이 있다.
상주는 조선시대 야당이었던 남인들의 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여당이었던 노론의 서원이 이렇게 잘 유지되고 있다.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 생각이 합당한 지에 대해 소통하였다.
흥암서원의 어필비각은 1716년에 숙종이 하사한 어서(御書)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각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상당한 공부와 폭넓은 경험을 통해 인생관을 만들었다. 자신들의 생각을 뒷받침할 정도의 지식이 없었으면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못했었다. 상주의 흥암서원에서 동춘당 송준길을 만나고 서로의 생각이 달랐지만 소통을 하며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