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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l 06. 2024

율곡 이이가 태어나다.

율곡 이이 선생과 화서 이항로 선생의 영정이 있는 평창의 봉산서재

강릉에 가면 오죽헌이라는 집이 있다. 강릉에 천석꾼 부자로 알려진 오죽헌은 검은 대나무를 담 밑에 심어서 불려진 이름이었다. 거부였던 신명화에게 있던 신인선이라는 딸은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글뿐만이 아니라 그림에서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기에 그녀의 아버지인 신명화는 그녀의 재능을 지켜줄 수 있는 그저 그런 집안의 아들과 결혼을 시키기로 생각을 했다. 고려와 조선초반까지는 돈이 있는 처가의 집으로 남자가 처가살이를 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보통은 남자가 집안을 빛낼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해서 처가로 데려오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신명화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신인선이 혼기가 찼을 때 만석꾼 집안에서는 경기 파주 덕수 이씨네의 이원수를 신랑으로 결정했다. 과거에도 급제하지 못했던 이원수는 한량이었으며 세상을 보는 통찰력이 없었다. 

강원도 평창의 봉산서재라는 곳은 율곡 이이 선생과 화서 이항로 선생의 영정이 있는 곳으로 율곡 이이 선생의 부친 이원수 공이 수운판관으로 벼슬을 하던 조선 중종(中宗;1530년경) 때 이곳에서 18년간(1526~1543) 거주하는 동안 사임당 신 씨에게서 율곡선생을 잉태한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당시 진사라도 해야지 존중을 받을 수 있어서 이원수는 파주 본가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하다가 부인을 만나기 위해 찾아갔다고 한다. 파주로 가는 길에 주막에 살았던 나름 매력 있는 주모는 전날 꿈을 꾸었다고 한다. 전날 밤 꿈에 황룡이 치마 속으로 기어들어가 하루가 지나기 전에 잉태하면 큰 인물이 태어나는 것을 보고 이원수를 유혹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날은 정말 오래간만에 신인선과 잠자리를 가져야 했기에 정력을 아껴야 했던 이원수는 그날만큼은 참았던 것이다.  

율곡이이가 태어난 해인 1536년 봄의 사실을 후세에 전하고 기리기 위해 창건한 사당이다. 야사에 따르면 처가로 갈 때 그 귀한 씨를 매달리던 주모에게 뿌리지 않고 부인에게서 주어서 낳은 아들이 이율곡이라고 한다. 

신인선은 한량인 남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았다. 현모답게 남편에게 여러 조언도 해줬는데 계속 과거에 낙방하자 우의정으로 있었던 당숙 이기에게 벼슬길을 부탁하려고 했다. 그러자 신인선은 남편에게 이기가 간신이었던 윤원형이 몰락할 것을 예감하고 간곡하게 만류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훗날 윤원형 일파가 몰락할 때 화를 면하게 된다. 

당대의 천재이며 후대에 수백 년 동안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던 율곡 이이의 어머니인 신인선은 스스로 호를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사표(師表)로 삼겠다는 뜻의 사임당(師任堂)라 하였고 훗날 신사임당으로 알려졌으며 5만 원권의 인물이 되었다. 

율곡 이이와 함께 모셔진 이항로는 화서학파(華西學派)를 형성하여 한말 위정척사론과 의병항쟁의 사상적 기초를 다져놓은 사람이다. 


글을 쓰는데도 신사임당에 미치지 못했던 이원수는 그냥 처가를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았다. 그림에 재능이 없었던 이원수는 그림 그리는 부인 곁에 그냥 앉아서 도와주기만 했다고 한다. 신사임당의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은 율곡 이이는 아홉 번 과거를 봐 아홉번 모두 장원으로 합격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린 사람이다. 그래도 아들이 그러했으니 아버지는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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