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에 자리한 한국교원대 교육박물관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교육
누군가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교육은 필요하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바뀌며 필요한 교육의 방식과 수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의 도시이기도 한 청주에 1985년에 한국교원대학교가 개교하였다. 1986년 3월에는 대학원 석사과정을 설치하고 같은 해 11월에 종합교원연수원을 설립하였다. 말 그대로 교육인들의 교육을 위한 공간이며 현재까지의 교육에 대한 방향성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교원의 수급만을 위한 양성기관에 그치지 않고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교원교육의 혁신적 모델의 개발과 학교교육에 관한 질을 고민하고 있다.
한국교원대학교에는 도서관·박물관·종합교원연수원·교육연구원·전자계산소·보건진료소·부속고등학교·부속중학교·부속초등학교·부속유치원·생활관·학생생활연구소·새마을연구소 등이 있다.
교육만을 위한 박물관을 조성해 둔 곳이 많지가 않지만 이곳에서는 교육과 관련된 역사적인 모든 자료를 접해볼 수가 있다. 봉건제 사회에서는 신분이 모두 결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노력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 역사에서 교육을 중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나 독서를 하던가 공부를 해서 신분상승을 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사회는 제한적인 상황에서 발전했고 그 한계는 명확했다.
교육박물관에는 한국욕사실이 자리하고 있다. 선사시대에서 조선시대 그리고 근대화시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교육과정을 살펴볼 수가 있다. 한국인들이 교육에 더욱더 민감한 이유는 비교적 다른 장벽보다 노력에 의해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다.
어떤 국가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가치관과 사회시스템 그리고 이념이 필요하다. 유럽과 같은 경우 종교가 이념이 되어 국가를 지탱하기도 했지만 그 한계로 인해서 무너지고 민주화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한반도에 자리한 조선시대에는 지배 이념을 위해 성리학을 끌어왔다.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 기관을 설치한 것은 그만큼 국가를 지탱하는 데 있어서 교육을 통한 시스템이 중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초적인 교육기관으로 서재, 서당이 있고 상위교육기관으로 지방마다 자리한 향교, 4부 학당, 중앙에 성균관을 거쳐서 최고 인재가 되었고 그 자리에 올라서 자신의 꿈을 펼치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각조 기술과 의학등을 배우는 관청이 있었는데 글을 배우는 것보다는 상당히 낮게 생각되었다. 지금의 의대가 미래에는 어떤 위치가 될지도 모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람이 배움으로써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은 조선시대부터 선비들의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인격 수양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편안하게 하는 이상적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독서와 사색을 통해 수양하고 관직에 나아가 백성들의 삶을 살피는 것으로 역할을 다하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다.
동시대를 두고 보면 조선과 유럽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었다. 유럽은 법률적으로 세습되는 귀족 신분이 있었고 이는 많은 차별을 가져왔지만 조선시대는 양반이 있었어도 이들은 자신이 노력하지 않으면 그만한 사회적인 지위를 누리는 것은 무척 힘들었다. 즉 자신이 노력해서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자식대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았으며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했었다.
이곳에는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이르는 교육과 관련된 물품과 이야기들이 있다. 교육은 본질적으로 과거와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가정마다 한계는 있으며 살고 있는 곳에 따라 가능성도 달라지며 경제적인 여건에 따라서도 많은 찾아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통해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있기에 시스템이 존재하는 것이다.
주머니에 있는 송곳은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게 마련이다. 빛은 감주처 지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회가 정한 어떤 성공이나 경제적인 성취를 이루지 못했더라도 적어도 자신은 알 수가 있다.
지금도 행정고시와 외무고시등이 있는 것처럼 인재 등용의 산실로 과거가 있었다. 사실 7급이나 9급을 뽑는 취지는 과거의 잡과를 뽑는 것과 유사하다. 상당히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일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일반적인 상식 수준에서 일하기 위한 사람들을 뽑는 것이다.
모두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많은 사람들이 인재 등용이라고 하면 문과를 통해 등용되기를 원했다. 관리를 등용하는 시험인 대과에 통과하는 것이 급제한 것이다. 생원이나 진사의 자격을 부여하는 소과는 그래도 양반의 흉내를 위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었다.
조선 후반부를 제외하고 조선은 개방적인 상황에서 과거를 치렀다. 평균 30년에 달하는 학습 기간 동안 많은 책을 수없이 읽고 세상일에 대한 대처방안을 알아야 했다. 그렇게 얻어진 것들이 새로운 지위였다.
제도는 한 번 만들어진다고 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누군가는 자신이 누렸던 것을 조금 더 수월하게 자식대에서 누리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뒷구멍이 생기고 뒷구멍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조선의 교육시스템은 무너졌다.
짧은 시간 동안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와 조선의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고 현재의 교육을 돌아본다. 과연 현재의 교육은 다양성과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기회를 주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자신이 누린 것을 그대로 노력 없이 자식이 누리게 하는 것은 자신에게는 좋은 일일지 몰라도 사회전체적으로는 모든 것이 무너지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돈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 같은 현실 속에서 사람들이 지향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청주교대와 한국교대가 모두 자리한 청주시는 교육에 관심이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사회에는 수많은 일자리와 누구나 원하지만 얻을 수 없는 제한된 기회도 있다. 그 기회가 어떻게 공정하게 배분되는지를 세밀하게 살피고 고민해야 하는 것이 교육이기도 하다. 배움을 위해 교원을 선택했고 그 교원들의 능력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교원대의 교육박물관에서 교육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