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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Oct 06. 2024

나주역 1929

나주의 근대화 여행을 떠나는 옛 나주역과 시민공원, 나주읍성

전쟁이 일어나도 사람들의 일상은 멈추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며 일상 속에서 그런 가치관을 추구하기도 하고 그냥 매일매일을 살아가기도 한다. 매일 시간을 들여서 통근을 하면서 일을 하기도 하고 학업을 하기 위해 이동을 하기도 한다. 옛 나주역은 매일매일 학교를 다니기 위해 조선인 학생을 비롯하여 나주에 거주하는 일본인 학생도 방문했던 곳이기도 하다. 

생명의 땅이라는 나주에는 수많은 일본인들과 중국인들, 조선인들이 함께 모여 살았다. 서로 간의 거주지역은 달랐지만 일제강점기에도 나주시에서 거주하면서 살고 있었다. 옛날의 나주역은 1913년 7월 1일 호남선 개통에 따라 신축한 근대건축물이다. 옛 나주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영산강은 지금과 다른 모습을 가지고 흐르고 있었다.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을 하면서 서로에 대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던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이 충돌을 일으킨 것은 1929년 11월 3일 통학을 하는 여학생을 일본인 학생이 시비를 걸었고 결국에는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옛 나주역은 사용하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원형이 보존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일제강점기 당시의 모습 그대로의 대합실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사방으로 창이 아 있는 곳에 옛날에 개봉했던 영화의 포스터가 눈에 뜨인다. 

옛 나주역의 바로 옆에는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두었다. 조선인 여학생을 건드리는 것을 본 조선인 학생이 일본인 학생과 충돌을 일으키고 이는 전국적인 학생독립운동으로 확산되어 154개교 54,0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고종황제의 사후에 1919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10년 만에 다시 전국적으로 일어난 독립운동은 학생이 주축이 되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에 고등학생은 지금의 대학생 수준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옛 나주역에는  학생독립운동 90주년을 기려 항일독립운동 정신을 기념하는 기념비에 학생의 모습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자리하고 있다. 

나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에는 나주지역의 식민지 상황을 비롯하여 나주보통학교 학생의 만세사건, 나주 출신 학생운동 지조다, 학생독립운동의 과정 등을 전시하고 있다. 국가보훈부튼 2011년 본 시설을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전국적으로 노무동원이 있었다. 노무동원이란 일제강 공권력을 동원하여 정책적. 계획적. 조직적. 집단적. 폭력적으로 각종 산업 현장에 강제로 노동력을 동원한 행위를 말한다.  

나무자로 동원된 조선인은 군수공장, 군부대공사장, 토건 공사장, 석탄광산, 금속광산, 항만운수작업장, 집단농장 등 11,500개소 이상의 다양한 작업장에서 강제노동을 했었다고 한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서 조금 위쪽으로 올라가면 나주 시민들의 공간이기도 한 나주시민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나지막한 야산으로 남산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나주 시민공원에는 일제강점기와 관련된 흔적이 남아 있다. 올라가는 길목에는 죽봉 김태원장군 기적비가 있다. 김태원장군은 순릉참봉으로 재직하던 중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단 소식을 접하고 1906년에 의병을 일으킨 사람이다. 

다른 도시의 시민들이 이용하는 공원에 올라가 보면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볼 수가 있다. 한국의 안전을 책임지는 부처를 행정안전부, 사법은 법무부다. 1907년에 헤이그 밀사 사건뒤에 일제는 강제로 모든 행정ㆍ사법 사무를 통감부의 감독 아래에 두는 정미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에 격분한 조정인 선생은 의병을 일으켜 일본 헌병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나주에서 잡혀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하늘이 유독 푸르고 맑은 날에 나주시 시민공원의 정산에 올라서본다. 정산에 있는 정자는 그 모양새가 독특하다. 마치 중국에서 볼 수 있는 정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래로 내려가 나주읍성을 들어가는 정문으로 들어가 본다. 고려 현종이 나주 금성산성에서 열흘 간 피난살이를 끝내고 수도로 돌아갈 때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다리를 지나갔다'는 길이 사매기길을 지나면 나주읍성이 나온다.  

전라도라는 지명은 고려 현종이 바꾼 것이다. 자신의 할아버지인 왕건의 처가 고장이 나주였으며 이곳까지 밀려왔을 때 극진한 환대를 한 곳이기도 하다.  강남도, 해양도라고 불리던 지명을 바꾸어 이곳 나주와 전주의 이름을 따서 전라도라고 하였다. 당시 왕건의 둘째 왕후였던 처가는 이곳 나주가 터전이었다. 

나주읍성의 골목길을 걸어가 본다. 수많은 일제강점기의 가옥도 남아 있고 옛 지명과 이야기들이 남아 있는 여행길이기도 하다. 나주읍성 흙돌 담은 읍성 권역 오래된 흙 돌담을 새로 쌓고 공터를 휴게 정원으로 조성하는 등 천년 목사고을에 어울리는 보행로도 조성을 해두었다. 

나주의 중요한 역사흔적이며 교육의 공간이었던 나주향교도 잘 보존이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나주읍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주읍성 영금문은 2007년 발굴조사 결과 지하에 유적이 잘 남아 있어 제 모습을 찾아 2011년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바닷물이 강을 따라 오르내리던 시절엔 이 뱃길로 황포돛배가 쌀 소금 미역 홍어 등 온갖 생필품을 실어 날랐던 이곳에는 먹거리가 풍성하였던 생명의 도시가 나주였다. 나주는 그래서 일제강점기에 많은 수탈과 적지 않은 충돌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나주읍성의 안에는 가을꽃과 코스모스가 해저물어가는 시간에도 자신의 존재를 부각하고 있었다.  

금성관→정수루→징고샅길→나주목문화관→목사내아 금학헌→예수재림교회→최부와 양 부자 집터→보리마당거리→서성벽길과 서성문→연리지→나주향교→사마재길→이로당과 소나무→명당거리→사매기와 향청터로 이어지는 길도 좋고 앞서 보았던 나주 학생독립운동기념관과 나주시민공원, 나주읍성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어본 다음에 나주를 대표하는 나주국밥을 한 그릇을 해보는 것을 추천해 본다. 


전남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전남 나주시 죽림길 26

전남 나주 시민공원 (남산공원)

전남 나주시 남산길 23

전남 나주 읍성

전남 나주시 남외동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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