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군 양경산 줄기에 형성된 산성형태로 축조된 읍성
사람이 살아 있던 곳은 길이 있고 흔적이 남게 된다. 그 길들이 모여서 역사가 만들어지고 역사는 다시 길을 내고 사람들은 그 길을 따라 살아가게 된다. 역사라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 걸었던 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남해로 가면 한 사람이 걸었던 길을 따라 이야기가 남겨져 있다. 1597년 이순신은 전세는 교착된 가운데 음력 2월 25일 삼도수군통제사 직에서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성으로 압송되었다.
하동읍성은 꾸준한 정비를 거쳐서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는데 아래에는 주차공간도 갖추고 있다. 전국에 사라져 간 읍성들은 중심지역이었지만 하동읍성은 특이하게 양경산 줄기에 형성된 골짜기에 자리를 하고 있다. 돌로 성벽을 쌓은 석축성(石築城)으로 전체둘레 1.4㎞, 폭 4.5m, 최고 잔존 높이 5.2m로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조선 태종 17년(1417년)에 만들어진 사적 제453호 하동읍성은 동·서·남벽에는 성문(城門)과 옹성(甕城)·치성(雉城)이 설치돼 있고, 적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자(垓子 도랑)를 팠으며 그 바깥으로는 양마장(羊馬墻 흙 둔덕)을 쌓아 방어했다.
하동읍성은 조선 전기의 전형적인 연해읍성(沿海邑城)으로 축성 연대가 명확하고, 문헌에 기록된 양마장이 최초로 발견돼 우리나라 성곽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순신은 1597년 3월 4일 투옥되었으나 우의정 정탁의 상소로 겨우 사형을 면하고, 4월 1일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천안, 공주, 논산, 익산, 삼례, 임실, 남원, 구례, 순천, 하동, 산청을 거쳐 도원수부가 있는 합천 초계에 당도한 날이 6월 4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는 백의종군길이라고 명명되어 있다.
거제를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칠천도라는 섬이 있는데 이순신이 백의종군길을 걷고 있을 때 7월 16일, 원균의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여 거의 전멸하고 남은 것은 군사 120명에 함선 12척뿐이었다.
이순신의 백의종군길 중 하동, 산청을 거쳐 합천에 이르는 길은 마지막 구간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순신이 백의종군길에 이틀 동안 묵었던 하동읍성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 최근 성벽 복원공사와 탐방로 개설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성벽을 쌓는 일로 말하자면 올해 쌓아도 될 일이고 내년에 쌓아도 될 일이고 10년을 걸려서 쌓아도 될 일이지만, 백성은 하루를 굶겨서도 안 되고 이틀을 굶겨서도 안 될 것이라고 정조는 말하기도 했었다. 그렇듯이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하다.
하동읍성의 위쪽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하동읍성의 형태를 다시 살펴본다. 하동읍성의 안쪽에는 수많은 집들이 있었을 텐데 모두 사라진 것인지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없어졌는지 궁금해진다. 하동읍성은 해발 100m의 양경산(陽慶山)에 있는 성으로 증보문헌비고에는 '1417년(조선 태종)에 축성했는데 둘레 1019자[尺], 높이 13자로, 성 안에 우물 5개, 연못 1개가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동읍성
경남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 산 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