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로부터 받은 재능과 열정, 여성편력으로 점철된 삶
예술적인 재능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제3의 눈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를 해본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은 열정적이기도 하지만 때론 파괴적이기도 하며 어떤 관점에서 보면 나르시시스트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차별화되는 자신의 지점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피카소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의 모든 거장이 그렇듯이 부모가 예술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탁월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렸을 때 그런 영향을 받아 자신의 재능을 키워나갈 수가 있었다.
살아있을 때로 모든 것을 누렸으며 자기 자산을 지키기 위해 첫 결혼을 했던 올가와 평생을 헤어지지 않고 다른 여자를 수없이 만났다. 정확하게 추산할 수는 없지만 피카소의 후손들이 가진 자산은 피카소의 유산으로 인해 약 10조 원을 웃돌 것으로 보고 있다. 평생에 걸쳐 4만 4,000여 점이 넘는 그림과 조각들을 남긴 피카소의 아버지인 호세 루이스 블라스코로는 동네 아이들에게 소묘를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1800년대 후반에 그림을 가르치던 아버지는 예술적인 재능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유아기부터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우면서 자라났던 피카소는 10살에는 그림을 배우는 일반 성인들보다 소묘실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 남겨진 작품 중에서 피카소의 소묘작품을 검색해 보았다. 말도 배우기 전에 그림을 그렸으며 화가 아버지 루이스 지도로 실력을 쌓았다는 피카소의 그린 스케치를 엿본 아버지는 자신보다 훨씬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위의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의 토르소 소묘다. 유아기부터 배운 소묘실력이 11살에 그린 토르소 소묘가 저 정도라고 해도 못 그린 것은 아니지만 매우 잘 그린 건지는 사실 모르겠다. 그리고 다음 해인 12살에는 당대에 최고의 예술가인 라파엘로 산치오처럼 그렸다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아무튼 아버지는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피카소에게 해주었다고 한다. 열세 살에는 피카소에게 개인전을 열어주기도 했었다. 역시 자신을 믿고 지원해 주는 후원자만큼 예술가에게 중요한 사람은 없다.
피카소에게 의미가 있던 말은 plz였다고 한다. 스페인어로 연필, 흑연을 뜻하는 줄임말이다. 자 그림을 하나 더 보자. 자신의 초상화를 소묘로 그린 것이다. 사실 피카소의 작품 중에 이렇게 그려진 작품들이 상당히 많다. 이 소묘 자화상은 프랑스 파리 피카소 박물관에 있다. 이 자화상을 한 카페에 첫 전시전을 열 때 150여 점이 넘는 데생이 전시되었다고 한다. 연필보다는 크로키로 대충 그린 것으로 보인다. 후대에 해석하기가 나름이지 유명해지면 무엇이든지 대범해지기 마련이다.
피카소는 유명세를 얻기는 했지만 돈을 제대로 벌기 시작한 것은 여러 여자와 동거를 하고 난 후에 만난 법률적으로 첫 번째 결혼을 한 올가 덕분이었다. 상류 귀족층에서 태어난 올가는 자신의 남편인 피카소를 상류층으로 소개를 했고 피카소가 아주 비싼 가격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 어떤 의미에서는 동업자이기도 했었다. 여자로서만 본다면 속 터지고 지금의 관점으로 본다면 용서할 수가 없는 사람이지만 아무튼 피카소는 올가 덕분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
피카소는 평생에 걸쳐서 자신의 뮤즈를 찾아서 떠나는 여행을 했다. 새로운 여자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화풍을 선보였다. 소묘라고 부를 수 있는 드로잉을 약 7,000점을 그렸다. 물론 아이와 같이 대충 그린 것들도 상당하니 모두 작품은 아니었지만 유명해지면 그런 것은 의미는 없다. 피카소 덕분에 후대의 예술가들은 똑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자신만의 그림을 당당하게 그리게 된 것도 사실이다.
수많은 구설수와 여성편력에도 불구하고 눈부신 재능에 만족하지 않고 평생에 걸쳐서 뼈를 깎는 노력을 하며 펜과 붓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노년에 카페에서 앉아 있는 피카소에게 아름다운 여인이 다가갔던 일화는 유명하다. 차를 마시고 있던 피카소에게 시간을 잠시 내서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피카소는 고개를 끄덕이고 5분 정도 그녀의 모습을 그려줬는데 제대로 된 소묘도 아니고 캐리커처도 아닌 휘갈긴 그림에 가까웠다. 얼마를 주면 되냐는 질문에 피카소는 50만 프랑(당시 약 8,000만 원)을 달라고 하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는 여인은 그린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음을 언급했다. 그러자 피카소는 당신을 이렇게 그리기까지 장장 40년 동안 수많은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라고 답해주었다.
올해 역시 계속 그림을 그리겠지만 사실적인 것을 넘어서 사람이 화폭에 스며들어 있는 느낌의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한 사람의 모습을 그냥 초상화로 그리는 것을 넘어서 공간 속에 시간이 녹아들어 가 있는 모습에 대한 갈망이 있다. 피카소 역시 작은 발판이었던 아버지를 딛고 일어서서 누구도 그 화풍에 비평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사람으로 남았다. 부모가 그런 재능도 없었기에 어릴 때부터 배움도 없었으며 평생에 걸쳐 지원도 없었지만 예술을 하고 싶어서 땅바닥에 흩뿌려진 유리조각을 밟아가면서 자신의 길을 가는 예술가들을 응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