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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Nov 27. 2017

베트남 세계 무기 박물관

붕타우 여행에서 만난 기록

세계 무기 박물관은 붕타우에 있지만 베트남 사람들도 그곳에 그런 것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물어물어 찾아간 붕타우 Museum of Worldwide Arm's에는 아쉽게도 한국의 무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중세 유럽의 기사단과 무기, 일본 사무라이, 인도에서 사용했던 무기들이나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미국의 무기나 그들의 모습을 볼 수는 있어도 한국의 무기나 의상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입장료가 따로 있는데 베트남 돈으로 10만 동이나 한국돈으로 5,000원 정도 한다. 


이곳에는 현대식 무기들도 있으나 대부분 유럽의 무기들과 역사 속의 한 장면 그리고 14세기부터 20세기의 무기와 세계사의 수십 장면들을 그림으로 만날 수 있다. 정보가 많지 않지만 직접 둘러본 이 박물관에는 1,200여 점의 총기와 100여 점의 투구, 실제 크기의 인형 500여 개, 1,000자루가 넘는 검과 귀족들을 위한 갑옷이 전시되어 있었다. 

오래된 흔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십자군 전쟁 당시의 의복부터 만날 수 있는데 이곳을 연 관장은 프랑스의 오랜 식민지였던 베트남은 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의 지배를 받기도 했던 베트남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려는 듯 보였다. 로마가 멸망하고 나서 교황을 중심으로 각자의 명분과 실익을 가지고 출발했던 기사단의 여정은 군소 영주의 불만을 이슬람으로 돌리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명분 없는 전쟁으로 변질되었고 십자군 원정은 예기치 못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붕타우 세계 무기 박물관은 고대의 무기를 수집하는 로버트 테일러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우연히 베트남 붕타우를 여행하다가 이곳이 좋아 박물관은 건립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보기 힘든 중세 유럽이나 중국의 투구나 무기들을 만나볼 수 있는 공간이다. 

박물관에는 몽고군의 의상이나 무기도 적지 않은데 1244년 몽골족의 진출로 서쪽으로 밀려온 크바레즈미 투르크족이 이집트인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을 약탈하기도 했다. 이집트는 세력이 약해진  몽골족을 시리아에서 몰아낸 후 맘루크족 술탄 바이바르스는 십자군을 가혹하게 대했기 때문에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몽골족과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전형적인 중세 기사의 갑옷이다. 중세시기에 갑옷은 판금갑옷으로 무게가 30kg에 달했지만 흔히 알고 있던 것처럼 육중한 무게로 인해 몸을 못 움직이는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갑옷의 무게를 신체의 전부분에 분산시켰기 때문에 웬만한 일상생활이나 달리기까지도 가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중국에게 오랫동안 지배를 당한 베트남어의 어휘는 대부분 중국어에서 차용한 것이며 타이어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중국의 다양한 갑옷도 볼 수 있다. 중국의 갑옷은 고조선의 장방형 갑편의 형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중국의 갑편 양식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지며 이후 왕조가 바뀌면서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영국을 빛냈던 제독부터 시작해서 유럽의 왕가와 당시 영웅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의 초상이 곳곳에 빼곡히 자리하고 있다. 독일제국 시절과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과 식민지 시절의 유럽 국가들의 장군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세계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산 역사의 장이 될만한 곳이다. 


세계 무기 박물관을 둘러보면 전쟁의 역사이기도 하며 총기의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6세기 말에 이르러 화승총은 머스킷으로 대체되었는데 다양한 머스킷 총도 이 박물관에 있는데 상당한 길이의 총신이 눈길을 끌었다. 1790년 인도 동인도회사에 근무하는 세포이 부대원들은 얼굴은 인도인이지만 스타일은 유럽 스타일로 동남아시아를 정복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총기를 사용하던 시대의 18세기 전투는 현대화된 대량 살상 무기의 20세기 전투와는 양상이 달랐다. 머스킷 탄알과 포탄으로 대열이 흩어지는 가운데에서도 드럼 연주에 맞춰 깃발을 펄럭이며 열병 대형으로 행진하였다. 

입구에서 안내해주는 대로 이동을 하는 것은 무기의 역사를 느끼면서 가는 것이 좋기 때문이지만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그 차이를 잘 모를 수도 있다. 입구에서 만나는 중세기 사는 말을 타면서 발사체 무기인 활, 화승총, 머스킷으로 무장한 보병에게 밀려나갔다. 총은 점점 진화해갔다. 독일의 비늘 총은 오스트리아의 로렌츠 머스킷보다 총구가 아니라 노리쇠로 장전했기 때문에 장전이 빠른 장점이 있었다. 

세계 무기 박물관에서 보는 것처럼 1차 세계대전전까지는 어떤 국가도 적국에 대해 기술적 우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지는 못했다. 독일을 무기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하고 독일 통일의 서곡은 콰니히그래츠 전투였다. 오스트리아는 그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프라하 조약과 동시에 프로이센에 항복하였다. 

쾨니히그래츠 전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나 유럽의 모든 군대가 노리쇠 장전 라이플을 사려고 아우성을 쳤다. 무기의 역사 이면에는 숙련된 산업 기술이 있었고 그것을 잘 활용한 국가 중 하나인 프로이센은 약소국에서 강국으로 부상했으며 백인들은 세계 정복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산업화는 군사적 평준화는 이루었지만 서구와 제3세계 사이에서의 불균형은 더욱 악화되었다. 

무기와 군사 조직의 우월함을 가졌던 유럽은 식민시대에 그들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열등한 민족들에 비해 도덕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기의 앞선 기술과 우월한 화력 덕분이었다. 

세계 무기 박물관에서의 마지막은 베트남의 현대역사에 깊은 상흔을 남긴 베트남전과 관련된 무기들이다. 베트남전을 기점으로 무기 전쟁에서 질적인 조직의 전쟁으로 넘어간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과 걸프 전쟁 사이 기간 동안 모병제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 영국은 1962년에 징병제를 폐지했으며 이후 미국 역시 징병제를 폐지했다. 

이제 베트남전에서 사용하던 무기들은 과거 검이나 활, 라이플 같이 박물관에서나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첨단 군사 장비가 대두되던 시기에 장기간의 전문가가 필요하지 단기간의 징집병들이 필요 없어져가고 있다. 


세계 무기 박물관에서 짧게는 100년에서 길게는 1,000년이 넘는 시간의 흐름 동안 무기의 변천사를 만나보았다. 프랑스는 쾨니히그래츠 전투 후 4년이 안되어 프로이센의 비늘총과 대등한 라이플을 만들어냈고 무기의 역사는 더 정확한 소총, 더 멀리 쏠 수 있는 장거리포를 만드는데 집중했다. 박물관에서 만난 인물 중 루이 14세, 펠리페 2세, 빌헬름 2세, 20세기 초 일본 지도자들은 자국의 군대와 무기를 최고로 만들었으나 조국을 파멸로 이끄는 전쟁으로 이끌었다. 


무기란 결국 누군가를 살상하기에 만든 것으로 오랜 시간 효율적인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박물관에서 날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무기들을 보면서 좋은 전쟁이란 없다는 것을 다시금 보게 된다. 


붕타우 세계 무기 박물관은 98 Trần Hưng Đạo, Phường 1, Tp. Vũng Tàu, Bà Rịa - Vũng Tàu, 베트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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