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 보상운동을 주도했던 사람을 기리는 김광제 동상공원
어떤 국가가 이익을 극대화하고 다른 국가의 자원을 탈취하기 위해 하는 합법적으로 보이는 방법이 돈을 빌려주는 것이다. 저렴한 이자로 돈을 빌려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국가는 점점 더 자주성을 잃어버리고 결국 속국이 되어버리는 결과를 만들게 된다. 가장 최근에 국가의 돈이 부족해서 문제가 된 것은 1997년의 IMF였다. 단기 자금을 확보하지 못해 한국의 경제는 모두 멈추어버렸고 IMF에 의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구조조정등을 통해 한국의 경제시스템이 모두 바뀌어버렸다.
최근에 더운 나라를 다녀온 덕분에 한국이 상당히 춥게 느껴진다. 사람은 그렇게 상대적으로 느끼게 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1997년에서 90년 전 대한제국에서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돈을 빌려주었는데 이 돈이 대한제국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게 되었다.
보령시내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당시 국채보상과 관련된 인물의 공원이 조성이 되어 있다. 김광제지사는 보령 웅천 출신으로 의병활동과 일본화폐 유통 반대, 친일파 배척 활동, 사립학교 설립 등의 활동을 펼쳤으며, 동래경무관 사직 후 1907년 1월 29일 대구에서 출판사인 대구광문사(大邱廣文社)의 사장으로 있었다. 그는 국채보상운동 발기연설문을 작성 낭독하였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되면 국고는 빠르게 비어 가고 경제는 망가지게 된다. 그렇지만 지도계층의 삶은 거의 변화가 없거나 오히려 자산이 늘어나면서 현실을 망각하게 된다. 당시에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1,300만 원이라는 거금을 갚아야 했다. 이미 조선 말기에 대원군의 무리한 화폐발행등으로 인해 국고는 거의 비어 있었다.
보령에 김광제 지사의 동상을 건립하기로 결의한 것이 2012년이었다. 그리고 2015년에 준공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 10여 년이 지났다. 김 선생은 당시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빌려온 국채 1300만 원(당시 정부의 세입 총액이 1318만 원 상당)을 갚아야 하는 국운의 절박함 속에 1907년 1월 대구의 서상돈 선생을 비롯한 지인들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다.
국가를 이끌어가는 사람을 잘 선택해야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어떤 이념이나 뜬소문이 아니라 국민의 삶을 나아지게 만들 사람을 뽑는 것이다. 실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며 누군가에 의해 선동되지 않아야 한다.
돈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어떤 돈이냐가 중요하다. 지금도 서민들이 고통받는 이유 중에 하나가 쓰지 말아야 될 돈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한다.
국채보상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도시가 대구였기에 대구에 가면 국채보상과 관련된 다양한 시설과 공간이 조성이 되어 있다. 대구시내에 가면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이 있다. 김광제 선생은 1920년 55세의 나이로 마산에서 순국·장례를 치렀으나, 후에 유가족이 고향인 보령시 평리에 이장을 했다.
보령이 돌로 유명한 곳이어서 곳곳에는 보령에서 생산되는 돌로 만들어진 조형물이나 쉴 수 있는 공간이 조성이 되어 있다. 품질이 우수한 백운석은 일제 시절 충남 보령의 광산을 전량 탈취하면서 맥이 끊긴 데다, 6.25 전쟁을 거치면서 갱이 허물어져 더 이상 채굴을 하지 못했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수많은 자원을 빼앗아서 일본으로 가져갔다. 피폐한 삶을 살아야 했던 시대의 삶 속에서 국채를 보상하고 자주권을 확보하려고 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김광제 선생은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 나라의 미래에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