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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새기는 여행

하루 한 장 내 삶에 새기듯이 퇴계를 따라갔던 호계서원

빠르고 자극적인 것이 대세인 것처럼 생각되는 요즘에 사람이 생각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어가고 있는 듯하다. 빠르게 콘텐츠를 소모한다고 하더라도 기억에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냥 시간만 지나갔을 뿐이다. 하루하루가 생명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진대 그 시간을 왜 그렇게 보내야 할까. 유학의 뿌리를 만든 공자에게는 특별한 선생은 없었지만,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배우려고 했던 사람이다. 그렇게 살던 공자는 노나라에서 가장 박식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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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을 주향으로 서애 류성룡 선생과 학봉 김성일 선생을 배향한 서원이다. 공자의 이야기를 공부했던 ‘퇴계 이황·서애 류성룡·학봉 김성일·대산 이상정-.’ 조선을 대표하는 유림(儒林) 4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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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호계서원은 그 규모만큼은 참 상당하다는 느낌이 드는 서원이다. 1871년 사라진 호계서원은 이후 7년 뒤 위패를 봉인하는 사당 없이 단순히 서원 강당만 안동에 복원됐었다. 안동댐 건설로 1973년 안동시 임하댐 아래로 옮겨 세워졌다가 2013년 호계서원 복원 공사 터로 옮겨 세워졌다가 복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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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이후 지난 400여 년 동안 퇴계학 중심으로 자리해 온 호계서원은 초기에는 여강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숙종 2년(1676)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이름을 호계로 바꾸었다. 조선시대에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는다는 것은 명문의 교육기관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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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서원은 앞에 주차공간을 지나가면 문루인 양호루가 있는데 양호루의 바로 옆에는 서원배치도와 안내문이 있다. 진학문을 들어서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강항의 중심건물이었던 호계서원 숭교당이 나온다. 숭교당의 앞에는 유생들의 기숙사 동재인 구인재, 서재인 명의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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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배우기를 좋아하는 호학을 실천해야 한다고 하였다. 남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시대에 남을 이해해야 비로소 스스로 걸어가야 갈길을 알았다는 옛 말이다. 인이란 다른 사람을 아끼는 것이며 지란 다른 사람을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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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은 유학의 고장이기도 하다. 퇴계 이황과 학봉 김성일, 서애류성룡, 대산 이상정을 모신 곳은 이황의 사상을 계승하고 정의하였다. 호계서원은 안동선비순례길 7코스(산림문학길)를 답사하면 방문하는 서원이다. 안동지방을 대표하는 도산서원도 있지만 호계서원도 그에 못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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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호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한 호계서원은 풍광이 좋은 곳이다. 퇴계 이황은 주자학을 깊이 연구해 공자‧맹자 등 중국 대륙의 유학을 조선에서 성리학으로 꽃 피웠던 사람이다. 퇴계학은 임진왜란 이후에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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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신은 한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데 있어서 매우 유용하게 사용이 되기도 한다. 한국의 음악이나 음식, 영화등뿐만이 아니라 K-정신도 전 세계에서 인정받을 날도 오지 않을까. 미국이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것은 결국 소프트웨어 파워가 있기 때문이다. 한류정신도 수출할 날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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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학공간에 올라가서 잠시 더위를 식혀본다. 사방이 뻥 뚫려 있어서 시원하게 바람이 오가고 있다. 실학의 대가이기도 한 성호이익은 비록 퇴계에게 배우지는 못했으나 직접 배운 사람들 이상으로 퇴계를 존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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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고 보면 무엇이 중요했는지 돌아볼 수가 있게 된다. 모든 진리는 시간이 답을 해준다.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는 것이 있고 그냥 유행처럼 지나가버린 것들이 있다.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삶을 바꿀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아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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