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왕 단종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영월 관풍헌
모든 지난 일에는 가정이 없다. 가정이 없다는 것은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실수의 크기가 크고 작건 간에 그걸 감당해야 할 일만 남아있을 뿐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돌리거나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왕은 삶이 유지되는 날까지 왕위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어내려진 왕들이 있다. 그중에 삼촌에게 끌려내려 간 왕으로 단종이 있다. 단종이 자신의 명대로 살았다면 어떤 왕이 되었는지에 대한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적어도 왕족이 아니었다면 비운의 군주라는 운명은 없었을 것이다.
군 단위에서는 극장을 운영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래서 작은 영화관을 지향하는 지자체들이 있는데 영월군의 대표적인 극장은 영월시네마로 조선시대 동헌이었던 관풍헌의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영월군은 올해를 기점으로 단종문화제의 대표 프로그램인 단종 국장과 단종 퍼레이드의 고도화 작업도 함께 추진하고 있다. 단종문화제는 영월의 정체성과 역사, 그리고 민초의 슬픔이 담긴 소중한 문화유산로 올해로 60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관풍헌은 정면 5칸, 측면 2칸. 이곳은 동헌(東軒)으로 사용되던 곳이었으나 1457년(세조 3) 왕위를 찬탈당하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되어 청령포(淸泠浦)에 유배된 단종이 이해 발생한 홍수를 피하여 일시 거처하였던 곳이다.
세조에게 단종이 살아있다는 사실은 불씨가 남아 있다는 의미였다. 단종을 위한 복위운동을 하던지 하지 않던지 간에 단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청령포에 갔다가 비로 인해 홍수가 나자 이곳으로 임시로 거쳐를 옮겼지만 같은 해에 세조가 단종복위운동을 구실로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으로 하여금 사약을 내리게 하여 단종은 이 해 10월 24일 이곳에서 죽었다.
앞에는 건물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상당히 넓은 면적의 공간이 매우 넉넉해 보인다.
저 앞에 보이는 건물은 자규루로 세종 10년(1428년)에 영월 군수 신숙근이 세운 누각으로 매죽루라고 불렀다. 단종이 유배된 해 여름에 관풍헌에 지내면서 매죽루에 자주 올라 자규시를 읊어 심정을 토로하였다 하여 후인들이 자규루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은 조계종 보덕사에서 포교당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건물은 팔작맞배붙임집인 정사(正舍)와 정사 좌우의 익사(翼舍) 1동씩으로 모두 3동이다.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 단종은 생각을 했었을까. 아마도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부인과도 완전히 이별하여 홀로 이곳에서 갇혀 지냈던 단종은 차라리 세상을 떠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여름의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한 6월이지만 이곳만큼은 시간이 멈춰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월에서는 단종의 국장행사를 재현하고 있는데 올해는 관풍헌에서는 ‘길지의 길을 열다’ 주제로 악귀를 물리치는 방상시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임금의 죽음을 알리는 상위복(上位復), 단종의 영면을 기원하는 견전의(遣奠儀)등이 진행됐다.
이곳은 외씨버선길 15길로 관풍헌 가는 길이다. 4백 년 시간을 두고 김삿갓과 단종을 만난다. 외씨버선길은 경상북도 청송군의 주왕산국립공원부터 영양군, 봉화군과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의 관풍헌까지 4개 지역 총길이 248km를 연결하는 문화생태탐방로이다.
광풍헌의 길 건너편에는 라디오스타에서 촬영을 했던 다방이 눈에 뜨인다. 영월은 희로애락이 있었던 장릉(유네스코 세계유산)과 청령포(천연기념물 제349호)는 단종의 생애와 비극적 역사적 의미를 오롯이 담고 있는 전국 유일의 인접한 역사 명소를 걸으면서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