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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22. 2017

2등 국민

관동 대지진 vs 국민보도연맹

1923년과 1950년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에서는 역사상 가장 큰 자연재해라는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고 한반도에서는 민족의 최대 비극이라는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관동 대지진과 한국전쟁은 인간의 폭력성이 극에 달하게 만든 학살사건이 일어났다. 이 두 사건 사이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관동 대지진이 발생할 당시 일본은 정권 교체 중이었고 대한민국 역시 이승만 정부가 제대로 자리를 잡고 있지 못할 때였다. 광복 이후에 미군의 원조에 겨우 먹고 살아가던 대한민국 국민들은 기본권조차 확보되지 못했고 일본 역시 호황기가 끝나면서 재정파탄에 이르게 되고 심신이 지친 일본 국민 역시 기본권을 확보하기 힘들었다. 


교과서 인정 관동 대지진 vs 교과서 불인정 국민보도연맹


올바른 역사적 진단에 따라 기술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는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 사냥에 따른 수천 명의 학살 자행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무차별 검속과 학살을 제대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전자가 수천 명이지만 후자는 수만 혹은 10만 명이 넘는다는 비공식 기록에 따르면 대한민국이 더 후안무치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동기도 비슷하고 집권자의 거짓과 권력욕에 따른 대규모 희생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철저히 그 사실을 외면해 왔다. 


이승만 정부의 주요 보직을 겸하고 있던 사람들은 미군정과 정부의 면죄부를 받은 친일파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십자군 전쟁 당시 교황청이 내려준 면죄부보다 더 강력한 면죄부를 받았지만 그들은 국민들이 친일파라는 사실을 알고 공격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들은 좋은 구실을 찾았다. 빨갱이라는 좌익세력 타이틀을 그들에게 붙인 것이었다. 당시 국민이라면 발급받을 수 있는 도민증이 아닌 2등 국민을 의미하는 보도연맹 원증이 지급되었다. 그들은 좌익혐의자 혹은 요시찰 대상자로 취급되었다. 사람이지만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신세였다. 초기에는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이 많았지만 조직을 확대해가면서 친일파였던 그들의 신분을 알 수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포함되었다. 


문제는 말단 행정기관에 조직원의 가입을 배당하면서  학력도 보잘것없고, 온순하면서 노동과 관련된 직접을 가진 사람을 가입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희생양으로 삼기에 적격이었다. 


“일본말이 서툴면 베어버려라”

"국민연맹원은 무조건 베어버려라”


국민의 관심을 돌려야 했다. 


이승만 정부에서 국가위기와 비상사태는 오히려 기회였다.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경찰과 CIC, 헌병, 우익단체 등은 임의적으로 국민보도연맹원을 집단 학살했다. 그리고 좌익에 의해 전복되면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국민에게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빨갱이의 망령은 오래도록 지속되어 2000년대까지도 정치에서 유효한 조커 카드로 활용되었다. 


수상 가토 도모사무로가 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야마모토 곤베에게 후임 수상으로 지명되었으나 내각이 제대로 성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 천황에 기대어 민중 위에 군림하는 각료 및 군부, 귀족원에 대항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기득권층에게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에서 대지진이라는 엄청난 재난이 발생하면서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만한 마땅한 아이디어가 생각나지 않은 때 유언비어를 만들어냈다. 학살당해도 마땅한 2등 국민 조선인이 있었다. 


공작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자경단이 조선인을 많이 죽일수록 계엄령의 명분도 축적되었고 보도연맹원에 대한 집단살해가 지속될수록  국민들에 대한 반공 선전에 대한 명분 역시 성공적으로 확보했다. 관동 조선인 대학살 당시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은 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두 명뿐이라고 밝혔지만 믿는 사람은 없었고 정치적 집단학살을 했던 이승만 정부에서는 제대로 된 진상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1923년 국제적 십자에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이 할 때 시신이 매장된 현장을 조사하기 전에, 미리 유골을 파내어 어디론가 이장하는 등 일본 정부는 이 조사 활동을 교묘하게 방해했다. 한국 정부는 학살이 일어난 이후로도 40여 년간 진상조사는커녕 그들의 후손들을 감시하고 페널티를 부여하면서 고통을 겪게 만들었다. 


“세상이란 건 그런 거예요. 언제든지 공평하지 않은 게 인생이라고요. 과거로 세월 보내는 사람들 때문에 국가의 힘이 낭비된다고요. “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된, 보도연맹 위원의 아들- 


보도연맹 조직을 이끌던 친일파들의 관동 대지진 당시 일본인을 위해 모은 돈은 당시 돈으로 132만 6339엔 960전이었다. 반면 일제가 학살된 조선인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지급한 위로금은 1인당 2엔에 불과했다. 


사람을 구분하여 2등 국민을 만들어 권력을 공고히 하던 기득권들의  비열한 방법은 너무나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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